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비봉산성 옛지도
비봉산성 옛지도

또 하나의 석실고분

읍내리 벽화고분(사적 제313호)은 지난 1985년 1월 대구대학교 조사단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졌다. 고분 현실(玄室) 남쪽 벽에 쓰여진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이 확인했다. 이 벽화고분은 학술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조사단은 축조연대를 539년 쯤으로 추정했다.

보고서를 보면 내부 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이다. 연도를 따라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棺臺)가 마련되어 있다. 규모가 작은 보조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었다.

현실의 크기는 동서 약 3.5m, 남북이 약 2m다. 네 벽의 위로 갈수록 약간씩 각을 줄여 쌓고 천장은 두 장의 판판하고 큰 돌을 올려 완성하였다.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백회를 바르고 그 위에 채색화를 그렸다. 특히 연도 서쪽 벽에 뱀을 손에 감고 있는 역사상은 무덤을 수호하는 신장이다.

이 고분은 벽화나 구조로 보아 고구려 석실고분임이 틀림없다. 다만 지안이나 평양 지역에 있는 고분에 비해 벽화의 품격이 떨어져 시대적 하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태장리 고분군3, 1호분은 가랑고개 마루 우측에 있다. 2011년 1월 풍기-단산 간 도로확포장공사 지표조사 중 발견됐다. 세종문화재연구원 발굴 조사에서 출자 형 금동관, 귀고리 등 신라계 유물이 다수 출토됐다. 피장자의 신분이 신라 왕족에 버금가는 계급임을 알려 준다.

비봉산성 오르는 길
비봉산성 오르는 길

비봉산성은 판축 고구려 성

고구려 급벌산군인 순흥(順興)에도 강원도 양구처럼 비봉산이 있다. 비봉산은 진산(鎭山)이기도 하여 고대 사람들은 대부분 읍민 보호용으로 성을 구축했다.

영주 비봉산성은 순흥면 읍내리 산29번지 일대의 비봉산(고도 360m)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비봉산성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오래전 폐사 되어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등강성’이 주목된다. <동국여지승람 비고 성지조>에 ‘등강성(登降城) 서남쪽으로 5리에 있다’라는 기록이다. 순흥읍성 향교에서 서남쪽 ‘五里’의 거리라면 바로 비봉산이다. 풍기군 고적조에는 등강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등강성. 군 서쪽 오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남정했을 때 이 현에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백제가 항복에 이르렀으므로 드디어 주필(駐蹕, 임금이 잠시 멈추는 일)했던 곳을 등강성이라고 이름 했다.”

여기서 ‘登’은 ‘오를 등’으로 ‘오’라고 발음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는 ‘오(烏)’ 혹은 ‘어(於)’ ‘어(御)’의 뜻이다. 여기서 ‘降’은 ‘임금의 나들이’를 뜻한다. 고구려 ‘於宿’의 고분이 바로 비봉산 아래 있으므로 ‘登降’이란 이름과 음이 비슷하다. 비봉산과 등강성에 관한 해석은 앞으로 성지 전문학자들과 어문학자들의 연구가 따랐으면 한다.

비봉산성은 높이 약 2m, 너비 1~1.2m, 길이 약 1350m로 나타나고 있다. 춘천 우두사성 제천 청풍면 도화리 판축성과 형태가 비슷하다. 해발 370~420m에서 가파른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정상 부분에 주성을 구축했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포곡식의 긴 토성을 구축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본래의 토성은 고구려 이전 토착세력이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형태로 보아 원삼국시대까지 올려다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에 신라, 고구려에서 성을 정복하여 이용했을 것이다.

1986~1991년 4차에 걸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실시한 <비봉산성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성안 서남편의 경사진 800m 지역이 건물지로 추정되며, 발굴당시 토기 조각과 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비봉산성 출토유물을 보면 5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굽다리 접시류 다수가 수습되었다. 또 6~7세기에 걸쳐 유행한 짧은굽다리 접시(短脚高杯), 인문토기(印文土器)도 함께 출토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주름무늬병, 덧띠무늬병과 고려시대의 도기 및 자기류 등이 확인되었다.

또 토제 어망추 3점, 골석제 방추차 1점, ‘대(大)’자 명문와편 1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막새 등이 찾아졌다고 한다.

비봉산성 터에서 찾은 토기 와편
비봉산성 터에서 찾은 토기 와편

비봉산성 고구려 와편조사

고구려 남단 소백산 이남지역에서의 고구려 와편들은 어떤 모양일까. 단양 용부원리 옛 절터에서 찾아지는 적색의 와편 모양을 수습 할 수 있을까. 취재반은 들뜬 마음으로 비봉산성 답사 길을 재촉했다.

<비봉산 조사보고서>를 보면 조사당시 여러 와편이 수습되었다고 한다. 한국역사문화연구회와 글마루 취재반도 성으로 오르는 개설 차도에서 적색 와편을 수습했다. 그러나 많은 양이 아니다. 다만 일부 기와에서 방격자문(方格子紋) 등이 보인다. 이 와편들은 차도에서 윗부분에 있는 건물지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수한 신라 와편과 토기의 잔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회색의 세장한 신라 선조문 기와는 소백산 일대의 여러 성에서도 발견 된다. 이 성에서 신라군이 고구려 세력을 추방한 후 건물을 구축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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