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소백산 넘어 순흥 - 영덕까지 공략 신라위협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영주 순흥 벽화고분 내부 연꽃문양
영주 순흥 벽화고분 내부 연꽃문양

고구려 세력 남하 영덕까지 점령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의 북변을 깊숙이 공략, 서라벌을 위협한 것은 489년의 사건이다. 지금의 서울인 백제 한성을 급습하여 개로왕을 참수한 후 14년 뒤의 일이었다. 장수왕은 일찍이 왕도를 지안에서 평양으로 옮기면서(427년) 줄기차게 남쪽 지역에 대한 영유권 확장을 추진 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제18 고구려 본기 제6 장수왕조>에 “9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여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 된다.

“소지왕 11년(489)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 과현(戈峴)에 이르고, 겨울 10월 호산성을 함락했다(炤知麻立干 十一年 秋九月 高句麗襲北邊至戈峴 冬十月陷 狐山城).”

고(故) 두계 이병도 박사는 ‘호산’을 지금의 예산으로 보았는데 필자는 호산성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으로 비정한다. 두계가 호산을 충남 예산으로 본 것은 이곳이 삼국시대 고산현(孤山縣)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예산은 신라영토가 아니라 백제 임성군(任城郡, 임존산성)의 영현이었다.

5세기 후반 장수왕시기 고구려 세력은 소백산을 넘어 신라북변 영토 안으로 깊숙이 내려와 영덕군까지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동해안을 따라 내려 온 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거점으로 삼은 적성(단양)이나 영월(왕검성) 혹은 제천(내토), 청풍(사열이성) 교통로를 이용한 것일까. 필자는 고구려 군사력이 충주-청풍-단양-영주-안동-의성-영덕 길을 통해 공격했을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영덕군 망동에 고구려의 남하를 알려주는 얘기가 구전으로 전해내려 온다. ‘고구려 군사가 과현(진우고개)을 넘어 신라로 쳐들어 왔다. 신라성(龜城)을 지키던 군사가 현 동산교회 뒷산 망대에서 고구려 군사의 동향을 살피는 곳, 즉 ‘망(望)을 보던 곳’이라 하여 ‘바라볼 망(望)자 망동(望洞)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고구려가 소백산 죽령을 넘어 거점을 잡은 곳은 바로 경상북도 영주시(조선시대 영천군)다. 당시 인근의 순흥부(及伐山郡). 인풍현(伊伐支縣)도 모두 고구려가 장악했다.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에 표고 320m 산이 있는데 이를 비봉산(飛鳳山)으로 불린다. 이 산 정상에 고대의 산성이 구축되어 있다. 주목 되는 것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비봉산 주변에서 고구려계의 석실 벽화고분이 발견된 것이다.

벽화는 퇴락하였지만 그림 가운데는 고구려의 문화적 잔영이 생생히 살아있다. 끝이 뾰족한 날카로운 연화문, 하늘에 떠 있는 구름무늬,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힘찬 역사상 등은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오늘은 고구려 세력이 남긴 중요한 문화유산인 고분 벽화가 살아 있는 경북 영주시 순흥 지역 유적들을 답사해본다. 과연 이 지역에선 어떤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영주 순흥 어숙묘
영주 순흥 어숙묘

영주시 주변 고구려 유적

현 영주시는 <동국여지승람 영천군조>에 보면 고구려 땅이라고 했다. 이름은 내이군(奈已郡)으로 신라 파사왕이 취했다고 되어 있다. 파사는 신라 제 5대 왕으로 동쪽의 작은 부족국가를 복속하여 영토를 많이 넓힌 왕이다. (本高句麗 奈已郡 奈一作㮈 新羅 婆娑王取地 景德王改 奈靈郡云云.)

그러나 파사왕이 영주를 고구려로부터 취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파사왕이 2세기 한강 주변을 공략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이 지역을 위시, 한강유역까지 진격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4세기 이후 신라의 영토였던 것을 장수왕이 빼앗고 이 땅을 6세기 중반 진흥왕대 와서 다시 회복한 것으로 상정 된다.

영주시 순흥읍에 ‘거묵골’이란 지역이 있다. 그런데 ‘거묵골’은 비봉산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이다. 바로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고구려 급벌산군(及伐山郡)의 치소다. 주변에는 어숙묘를 비롯하여 읍내리 벽화고분, 태장리 고분군3, 1호분 등 약 15기의 고분이 발견됐으며, 고분 내에서는 출자형 금관등 많은 양의 주목되는 신라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거묵골을 동네 사람들은 옛날 먹을 생산했던 관계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필자는 재미난 사실을 찾았다. 고분의 주인공인 고구려 어숙(於宿)의 비밀이다.

중국 기록을 찾아보면 ‘於’는 까마귀를 지칭하는 ‘烏’의 본래 글자라는 것이다. 공자도 ‘烏’는 ‘於’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흑색을 지칭하며 어는 순화로운 기상을 의미하고 오운(검은 구름), 오발(검은 머리)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孔子曰。烏,亏呼也。亏各本作盱。今正。亏,於也。象气之舒。黑色的。如:烏雲、烏髮 云云)

그러니까 於宿은 ‘烏宿’으로 읽을 수 있다. 고구려 지명과 인명에 많이 나오는 ‘奈’는 ‘烏’로 또는 ‘御’ 해석되며 이는 고구려 왕실과도 관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주 ‘어숙묘’의 주인공은 평양에서 파견 된 고구려 왕족일 수 있다. 왕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큰 석실고분을 만들고 벽화를 그려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제238호 어숙묘에 대한 발굴보고서는 이 고분을 삼국시대 신라로 보고 있다.

“순흥 어숙묘(順興於宿墓)는 비봉산 서남 남사면에 있는 신라의 벽화무덤이다. 흙을 쌓아 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지름은 16m이며 파손이 심하여 높이는 확인할 수 없다.

봉토 아래쪽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다. 내부는 널방(현실)과 널길(연도)이 있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다. 현실의 4곳의 벽과 천장 표면에는 석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으며, 바닥에는 널을 올려놓는 넓은 널받침을 설치하였다. 서쪽 벽 위에는 도굴로 인해 흙이 밑에 쌓여 있었고, 유물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널방은 돌로 문짝을 세워 닫았으며, 널길 입구에는 막돌을 쌓아 막았다.

그림은 무덤 전반에 걸쳐 그려졌으나 자연적인 습기 등으로 파괴되고 널길천장과 문짝에만 벽화가 남아있는데 모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천장에는 대형 연꽃무늬 1개가 그려져 있는데 붉은색 한가지로만 연꽃을 그린 것이 특색이다.

묘지명(墓誌銘)은 석비내면의 석면 위에 일렬 종으로 각자(刻字)하였는데, 내용은 돌로 만든 문짝의 바깥쪽에는 인물상으로 보이는 그림이 전면에 그려 있으나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며, 문짝의 안쪽에는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란 글을 새겼다.

을묘년은 연꽃무늬로 보아 법흥왕 불교 공인 이후인 6세기말의 진평왕 17(595)년으로 추정되며, 어숙(於宿)은 사람 이름으로 지(知)는 존칭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역사에서 '어(於)'자가 들어가는 인물명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고구려계이다. 술간(述干)은 신라의 관직명으로 진흥왕 창녕 순수척경비(眞興王 昌寧 巡狩拓境碑)에 이미 나오는 관직명이며, 외위(外位)의 둘째 등급 관등의 하나이다. 6세기경 이 지방이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지역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어숙묘 내부 모든 벽면에는 채색화가 그려져 있었으나 보존 상태는 나쁘다. 천장에 그려진 연화도의 꽃잎은 7판이며, 중판으로 표현하였는데 끝이 뾰족하다. 이는 고구려 평양이나 지안에서 발견되는 연꽃의 보편적인 형태다. 꽃잎의 가장자리는 붉은색으로 그렸고, 끝부분은 검은 선으로 덧칠하였다.

영주 순흥 벽화고분 내부
영주 순흥 벽화고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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