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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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하늘에서 기러기가 울고 온다. 가을이 온다.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 날지 않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린다….’ (김동리 ‘바위’ 중에서)

폭염의 여름이 지나고 매미 울음소리가 자취를 감추면서 조석으로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 이때쯤이면 추석이 찾아든다. 명절을 앞두고 하루벌이나 동냥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최하류층들이 읍내에서 가까운 기차 다리 밑에 모여 다가오는 가을을 근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내용이 위의 ‘바위’ 작품이다. 필자는 어린 시절, 여름이 끝나가는 때쯤이면 가족들과 동네 천방 변에 자리를 깔고 누워 밤하늘을 보면서 ‘밤이 되어도 반딧불이 날지 않고 은하수가 점점 하늘 한복판으로 흘러내린다’는 이 글이 소설인 줄 모른 채 그저 좋아 암송했던 생각이 나는데, 이 글을 통해 가을이 시작되면 본적 없었던 기러기가 오는구나 생각만 했지 소설 속에 전개되는 최하층 사람들의 생활고, 애환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다.

지금은 아무리 가난해도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하는 국민은 없다. 그만큼 경제면, 물질면으로 풍요롭다는 이야기인바, 60년대 심지어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시골에서는 그런 걱정을 하거나 때를 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기다. 구태여 여기에서 현실적이지 않은 50년 전 이야기가 통할까마는 우리에게도 그렇게 어려운 시대가 있었다는 것이고, 헐벗고 주린배를 안고 참고 견디면서 오늘의 경제부국을 이룩했다는 점을 애써 말함이다. 이는 순전히 ‘하면 된다’는 우리 국민들의 저력에서 기인된 것이었고, 이 땅을 살아가는 노년층들과 산업역군들의 피땀으로 이뤄진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한때 그런 비참한 세월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관은 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또 국민은 국민대로 숱한 일들이 벌어졌고 우여곡절은 있었을 테지만 사오십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제 사정이 풍요해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 경제생활에서 역작용이 다반사로 됐고, 특히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일상화돼 양극화가 고착된 것은 어수룩한 세월이 만들어준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국민생활이 다소 풍요해질수록 부(富)를 향한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부풀어 오른다. 누구나 ‘말을 타면 종을 앞세우고 싶다’는 한 계단 상승의 욕망이 있으니 개인적 문제로 탓할 수는 없는 일.

국민 개인에 대한 배려, 자유민주적 권리의 신장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경제적 이익과 관련해서는 국가의 공정성이 기본이다. 이번에 정부에서 지급되는 코로나19 재난지원금(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에서 제외된 국민들이 이의신청 내는 현실은 정부의 방향성에서 문제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 대목이다. 건강보험료가 전 국민에게 일률적인 기준이 되다보니 지역 건강보험료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잘못된 건보료 부과책정으로 인해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니 이들의 이야기는 ‘나보다 잘사는 사람들도 다 받는데 그들보다 수입이 적은 내가 받지 못하는가’에 대한 항의다.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 지원을 결정하면서 여당에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는 게 낫다’고 주장했지만 정부 반대로 하위 88%선으로 추계해 지원대상으로 잡았다고 한다. 88%든 90%든 기준선에서의 공평성 문제다. 이의신청을 받아 90%선, 즉 상위 계층 10%를 제외하고 전 국민에게 국민지원금을 지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제외된 자들은 우리는 세금도 지원받는 자보다 많이 내는데 불공평하다고 항의하게 되면 또 어쩔 것인가? 정말 지원선의 기준 잡기가 어려운 문제인데, 이는 경제정의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적 문제는 공정성과 효율성인바 공평한 분배와 기회균등의 제공에 따른 분배정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해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다. 부유층, 고소득층이라 하여 비난 대상이 돼서는 안 될 것이지만, 그들도 가난한 이웃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심은 있어야 하겠다. 추석 명절을 맞이해 불우시설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기부액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에는 사회적 약자를 깔아뭉개듯 봉급 인상 투쟁에 앞장서 총파업에 나서겠다는 억대 연봉자들의 엄포를 바라보는 자영업자나 서민들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금융노조가 지난 10일 “4.3% 임금 인상률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10월부터 은행 점심시간 업무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데, 지난해 KB국민은행 직원의 평균 연봉은 1억 400만원에 이른다. 그들에게는 인금인상이 당연시될지 몰라도 이를 바라보는 국민시선은 달갑지가 않을 것이다. 2년째를 맞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어려운 상황에서 자영업자, 영세서민 등 민생은 ‘바이러스 폭풍’ 속을 헤매는데 서두에서 언급한 김동리 선생의 바위 첫 단락 중 이어지는 대목, ‘아무데서나 쓰러지는 대로 하룻밤을 세울 수 있던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러기 소리가 반갑지 않다’는 글이 추석명절을 앞둔 서민들의 마음 같기도 해 답답한 심정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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