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향후 3년간 240조원 투자와 4만명을 고용하기로 했다. 지난 201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영 복귀 이후 내놓은 발표보다 60조원이나 증가한 수준이다. 이는 이 부회장이 가석방 후 11일 만에 내린 결단으로, 정·재계에서 거론되는 ‘이재용 역할론’에 대한 화답인 셈이다. 위기 때마다 대규모 투자로 경쟁 업체를 압도하는 삼성의 힘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엘지전자와 삼성전자에서 각각 근무한 경험이 있는 중소기업 육성 경영전문 컨설턴트 박광수 칼럼니스트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이 질문에 답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천지일보 2021.9.2
ⓒ천지일보 2021.9.2

전직 삼성맨의 삼성이야기

<1> 삼성의 힘은 어디서 시작됐나

이병철 조부·부친 대지주 가문

마산 첫 사업 중일전쟁으로 파산

삼성물산공사 창설로 무역업 본격

 

유통·의류·보험 등 초고속 확대

사카린 밀수·자동차 아픈 사건도

최근 코로나 이후 겨냥 대규모 투자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해외주재원 및 관련 분야를 망라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박광수 한국과학기술원 자문위원은 학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30여년간 근무했다. 연구개발·생산기술·기획·품질관리·영업·구매 관련 분야를 망라한 것은 물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해 미국 일본 등 해외주재원으로도 활동했다. 삼성전자 퇴사 후 미리넷과 태평양 임원 등을 역임했다. ⓒ천지일보

한국 경제계의 거목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은 배산임수의 명당인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1910년 2월 12일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이씨로 16대조 계번이 입향조로서 경남 의령에 정착해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고 의령 진주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서 가문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부 이홍석 대에 천석의 부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보유한 지주로 가문이 성장했고 영남의 거유라는 허성재의 문하로 인근에 알려진 유림이며 시문에 능통한 집안이었다.

조부의 재산을 이어받은 부친 이찬우는 한성을 오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 청년회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당시 한성에서 고 이승만 전 대통령과의 교류도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어려서 조부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깨우친 수재로 당시 진주군 지수공립보통학교, 경성 수송공립보통학교, 중동중학교에 진학해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1926년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의령에서 결혼했다. 중동중학교 4학년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홍제를 만나 500원을 빌려 유학 준비를 하고 1929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이병철 회장은 유학시절에도 틈만 나면 일본 공업을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지역 공장을 방문했고, 이는 그가 삼성그룹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돼 1931년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귀국한다.

후일 호암 자서전에는 이렇게 회고한 글이 있다.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며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하게 됐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회의가 들어 포기했다.”

신학문에 영향을 받은 이병철 회장은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집안 머슴들을 내보내며 전별금까지 주면서 자생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이후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과 박정원 과 동업을 해 마산에 도정공장과 협동정미소를 차려 운영했으나 중일전쟁 여파로 파산한 것으로 전해진다. 

◆첫 사업 실패… 3만원으로 시작한 별표국수

첫 번째 사업의 실패를 경험한 이병철 회장은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사업을 구상하다가 1938년 3월 삼성그룹의 시발점이 된 ‘삼성상회’를 부친이 준 자본금 3만원을 가지고 대구 수동에서 시작했다. 여기서 삼성그룹 최초 브랜드인 별표국수를 제조해 판매했으나 후발주자로 크게 성공은 못하고 포기한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도·소매업과 중국 수출까지 확대했으며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해 운영 중 해방을 맞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해 다음 해 종로 인근에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면서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는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 일원으로 선발돼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을 시찰하고 패전한 일본이 어떻게 다시 부흥했는지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온다. 그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가 삼성물산을 설립해 설탕·비료 등을 수입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이를 기반으로 1953년 8월 제일제당을 설립해 국산 설탕을 제조해 판매했고, 1954년 9월 제일모직을 대구에 설립, 골덴텍스를 출시한다. 또한 이를 계기로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며 사업영역을 본격적으로 확대해간다. 한편으로는 1957년 한국 재계 최초로 신입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시행해 전국각지의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는 기반을 구축하는데, 이때부터 인재 제일이라는 기업문화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57년 5월 부산공사와 대한제유 사주인 강의수가 설립한 동방생명 및 동양화재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이병철 회장은 1962년 이를 이수한 후 1963년 삼성그룹사로 개편했으며 1989년 삼성생명으로 사명을 변경해 삼성그룹의 주력사로 성장시켰다.

1930년 10월 개업한 한국 백화점의 시초 미쓰코시 경성점이 동화백화점으로 사명을 변경해 운영하다가 1963년 삼성그룹에서 인수하고 사명을 신세계백화점으로 바꿔 경영했다. 1922년 설립된 안국화재도 1958년 삼성에서 인수해 삼성화재보험으로 사명을 변경해 운영 중이며 1965년 1월 설립된 새한제지공업도 1965년 삼성에서 인수해 전주제지(현 한솔제지)로 운영했다. 

◆언론·전자·중공업·건설 등 거침없이 사업 확장

1964년 한국비료를 인수해 운영하던 중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이 발생하면서 차남인 이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됐다가 병보석으로 6개월 만에 석방됐으며 삼성은 그해 9월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했다. 이후 이창희는 새한미디어를 설립해 운영 중 삼성 가문 최초로 기업이 몰락하기도 했다. 1964년 5월 삼성은 동양라디오, 동양방송을 설립하고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해 언론 분야까지 초고속으로 사업을 확대해갔다.

1969년 1월 사돈 기업인 엘지그룹의 반대에도 이병철 회장은 전자사업에 관심을 갖고 수원시 매탄동 일대에 45만평을 매입,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한다. 이어 같은 해 12월 일본기업인 산요와 합작해 삼성산요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흑백TV를 생산했고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로 변경해 그룹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을 설립해 제3, 4공화국 당시 수출 위주의 경제 성장 정책을 빈틈없이 시행하는 선두적 역할자로 중화학공업시대를 이끌어가는 견인차 노릇도 했다. 1976년 4월 17일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을 개장하고 1973년에는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호텔 사업부가 신설돼 임페리얼이 설립되고 영빈관을 인수해 신라호텔이 개관한다.

건설 분야는 1957년 자동차 회사인 신진공업이 모태로 1976년 신원개발로 상호를 변경해 경영하다가 1979년 삼성그룹에서 인수해 삼성건설로 사명을 변경해 경영하다가 삼성물산건설로 흡수돼 현대건설을 제치고 국내 1위 회사로 성장한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의 지시로 삼성자동차를 설립하고 1998년 일본 닛산자동차의 기술 제휴로 SM5 중형자동차를 출시했으나 때마침 불어온 외환위기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적자를 내다 1999년 법정 관리를 신청, 프랑스 르노사가 2000년 삼성자동차를 인수해 사명을 르노삼성으로 변경하고 삼성이 지분 일부를 가졌다. 그러나 결국 판매 부진과 적자 누적으로 삼성은 지분을 르노사로 완전 매각해 내년부터는 르노삼성 상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가족력인 암으로 고생하고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하직한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삼성의료원이 설립되고 1994년 11월 삼성병원이 세워졌다. 또한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 대학교에 1997년 의과대학을 세워 의료진을 양성 중으로, 삼성의 전폭적 지원 속 2020년 세계 50위권에 들어가는 명문 의과대학으로 커가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의 새로운 동력을 찾으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12명으로 꾸려진 사업팀이 찾아낸 ‘IT를 접목한 헬스케어’ 사업이다.

최근 발표된 삼성의 240조원 투자 계획에는 바이오를 제2반도체 산업으로 육성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바이오를 향후 한국 경제의 양대 축으로 키워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한다는 포부로 보인다. 이에 발맞춰 현재 건설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을 조기에 완공시키고 제 5, 6공장도 추가로 건설해 코로나19 백신, 세포 유전자 치료제 시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구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정리 = 이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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