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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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언론중재법) 개정안 처리를 두고 찬반으로 대립하던 여야가 지난달 31일 극적으로 타협했다. 민주당 윤호중, 국민의힘 김기현 원내대표는 개정안 처리를 9월 27일로 미루고, 그 사이 여야 8인 협의체를 꾸려서 좀 더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보면 타협안으로도 볼 수가 있지만, 실상은 타협보다는 ‘절충안’에 가까워 보인다. 민주당은 출구를 마련하려는 듯이 보이고, 국민의힘은 한 발 물러나면서 시간을 벌겠다는 의미에서 양측 모두 ‘전략적 절충안’의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려했던 물리적 충돌은 피할 수 있었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정안 처리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여야가 합의한 9월 말이면 문재인 정부의 마지막 정기국회가 한 창일 테고, 그것도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게다가 대선정국이 본격화 되면서 여야 간 격돌은 더 격화될 수밖에 없을 때다. 여야가 합의로 그 무엇을 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당초 지난달 말까지 본회의 처리를 강력하게 공언했던 민주당 지도부마저 이미 발을 뺀 상황에서 외부 인사까지 포함된 8인 협의체가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개정안 정도라면 몰라도 당초 민주당이 강조했던 ‘언론개혁’의 기조가 살아있는 개혁안 처리는 어렵게 됐다고 봐야 한다.

여야 간 전략적 절충안이 갖는 한계가 워낙 컸기 때문일까. 여야가 9월 말로 연기하는 내용으로 합의한 지 하루 만에 그 내용을 놓고 또 정쟁이 격화되고 있다. 두 당이 합의한 내용 가운데 제5항을 보면 “‘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9월 27일 본 회의에 상정, 처리 한다”고만 돼 있다. 문구 자체가 원론적이며 추상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게다가 제2항과 3항에 ‘협의체’를 구성해서 논의한다는 합의까지 포함돼 있기 때문에 해석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이를테면 협의체에서 논의만 하는 것인지, 만약 논의를 해서도 합의가 안 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다. 결국 전략적 절충이 낳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협의체에서 논의를 하되 합의가 안 되면 당초 민주당이 제시한 개정안도 27일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국민의힘은 여야 합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굳이 8인 협의체를 구성할 이유가 없었다며, 여야 합의에 의한 개정안이 나올 경우 27일 처리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합의문에 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여야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전인수식의 서로 다른 해석을 당초 그들은 몰랐을까. 결코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서로 알고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김으로써 전략적 절충에 이심전심으로 손을 잡은 것이다. 서로 상대방 탓을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언론개혁을 표방했던 당초의 그 개정안은 이미 물 건너갔다고 본 것이다.

여야 정치권이 이처럼 속 보이는 타협안으로 어물쩍 넘어가는 분위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언론개혁의 취지는 이쯤에서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언론자유에는 그 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다. 이렇다 할 책임도 없는 언론이라면 그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사회적 흉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 시대 언론의 현실을 보면 그런 흉기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점이다. ‘가짜뉴스’가 판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 얘기다. 설사 일부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왜곡과 낯 뜨거운 해석 심지어 조작과 음모의 기술은 이미 책임과 윤리의 한계를 넘어섰다. 언론 스스로의 자정이나 노력으로 풀 수 있는 단계도 벌써 지났다. 강력한 처벌과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사회적 괴물’이 될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똬리를 튼 채 온 나라에 분열과 갈등, 음모와 저주, 왜곡과 편향을 조장하는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것이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이뤄진다면 그 독성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참된 언론, 언론다운 언론, 사회적 공기(公器)로서의 정론직필이 들어설 공간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개정안에 대한 민주당의 후퇴와 국민의힘이 노리는 시간끌기용 절충은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 처음부터 언론개혁의 확실한 방향과 구체적인 범위와 조건 그리고 실행에서의 부작용 등을 불식시킬 수 있는 디테일한 기준들을 미리 마련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얻었어야 했다. 그래야 개혁입법에 탄력이 붙는 것이며, 야당은 물론 당사자들인 언론계도 쉽게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도부는 설익은 개혁입법 추진은 물론 심지어 개정안의 내용과 기준마저 부실하다보니 야당은 물론 언론계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도 적잖은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도록 자초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어설프고 무모하며 심지어 개혁의 진정성마저 의심될 정도이다.

그러나 이대로 개정안이 무산되면서 언론개혁의 취지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송법이나 신문법 등 패키지가 어렵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1인 미디어 규제를 핵심으로 하는 정보통신망법도 개혁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2보 전진이 어렵다면 1보라도, 아니 반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좀 더 치밀하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아주 늦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 한 달여 시간은 어쩌면 개정안을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언론의 자유는 더 높게, 그만큼 언론의 책임은 더 강하게 묻되 피해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좀 더 정교하게 재설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5년을 결산하는 마지막 정기국회다. 그럼에도 끝까지 개혁입법이 논의되고 처리되는 그런 마지막 국회의 저력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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