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시청 소독반(11월 15일). 경시청 소독반이 우물을 소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불령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 집단 학살의 원인을 제공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경시청 소독반(11월 15일). 경시청 소독반이 우물을 소독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제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불령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 집단 학살의 원인을 제공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일제, 관동대지진 당시 민심 수습 위해 유언비어 퍼뜨려
자경단··불령단 등 무자비하게 조선인 학살 자행
명백한 제노사이드… 관심 갖고 일본 정부 사죄 받아내야

[천지일보=백은영 기자]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 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진도 7.9급의 초강력 지진은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을 낳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진이 대화재로 번지면서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일대는 전기와 수도는 물론 전신, 철도까지 파괴돼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경제 불황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차에 대지진까지 발생하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폭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정부는 민심과 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고, 지진 발생 다음 날인 9월 2일 출범한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기로 했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항거‧저항했던 조선인을 일제가 부정적으로 지칭한 말이다. 여기서 ‘불령’은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도의에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며 ‘선인’은 조선인을 뜻한다.

일본은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일제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불령선인이라 칭했다. 일제는 비폭력 만세운동인 3.1운동을 불령선인의 폭동이라고 치부했으며,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 당시 불령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타서 일본인을 살해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결과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유언비어의 급속한 확대의 배경에는 군대와 경찰이 있었고, 도쿄 시민들은 자경단(自警團)을 결성해 조선인을 발견하면 죽창이나 쇠갈고리 등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자경단만 3689개에 달했다. 군대에 의한 조선인 학살도 자행됐으며 ‘불령단’이라는 폭력단체를 조직해 조선인들을 살해하는 데 노골적으로 가담하기도 했다.

 

조선인 수용 보호(경시청 별관, 9월 14일). 경찰서 ‘조선인 수용 보호’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왔지만 살아나간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자경단들에게 경찰서는 쉽게 조선인을 학살할 수 있는 장소였다.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압박에 못이기는 척 뒷문으로 내보내면 끔찍한 학살이 자행됐다. 사진 속 모습이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조선인 수용 보호(경시청 별관, 9월 14일). 경찰서 ‘조선인 수용 보호’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상 이들은 보호받지 못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려왔지만 살아나간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자경단들에게 경찰서는 쉽게 조선인을 학살할 수 있는 장소였다. 조선인을 내놓으라는 자경단의 압박에 못이기는 척 뒷문으로 내보내면 끔찍한 학살이 자행됐다. 사진 속 모습이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경찰서 내 조선인들의 모습(9월 10일). 사진 속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지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눈을 지움으로써 추후 일어날 조선인 학살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경찰서 내 조선인들의 모습(9월 10일). 사진 속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지워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사람을 특정할 수 있는 눈을 지움으로써 추후 일어날 조선인 학살의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제공: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 ⓒ천지일보 2021.8.31

군과 자경단, 불령단 등에 의해 학살당한 조선인이 6000명(독립신문 발표)에서 많게는 2만 3000명 이상(독일 문헌 등)으로 파악된다. 이는 문헌상의 숫자일 뿐 실제로는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923년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코 마고토는 학살당한 조선인은 2명이며, 이것도 오인으로 인한 희생이었다고 발표했다. 일본 정부의 어이없는 행보는 10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와 속죄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과 국민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편 관동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우리 선조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30년 넘게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모아온 정성길 관동대지진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은 “관동대지진 당시 자행된 조선인 대학살은 제노사이드 범죄”라며 “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본지는 창간 12주년을 맞아 다시금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을 알리고 국민적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 사진 몇 장을 공개한다. 특히 이번에 소개되는 사진들은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경시청 주관으로 발행된 자료집(화보집) 중 대지진과 대화재 당시의 기록을 담은 간지 형식의 사진집 중에서 선별한 것으로 더이상 발뺌할 수 없는 확실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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