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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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 군필자’라는 재밌는 말이 도쿄 올림픽을 통해 생겼다. 양궁 2관왕 17세 김제덕 선수가 메달을 따며 군입대를 면제받는다는 말이다. ‘아파트 특공’ 자격까지 얻었다며 애교 섞인 시샘의 글도 있다. 불과 만19살의 양궁 3관왕 안산 선수의 여유 있고 당찬 올림픽 경기 모습은 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런 걸출한 스타 2명이 이번 올림픽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은 한국 양궁의 ‘공정한 선발 시스템’ 덕분이다.

양궁 국가대표는 오로지 실력으로만 선수를 선발한다. 지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라도 똑같이 처음부터 토너먼트를 거쳐 이겨야 올림픽 출전 자격을 얻는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 과정은 먼저 국내 상위 130명이 1차 선발전을 거쳐 64명이 선발된다. 다시 2차 선발전을 거쳐 20명을 선발한 후, 3차 선발전에서 8명을 선발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최종 평가전 2회를 치러 올림픽 출전자 3명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1차 선발전에서 1등을 해도 2, 3차 선발전에서 순위권을 벗어나면 즉시 탈락을 한다. 어찌 보면 매정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다. 총 4055발의 사격을 통해 국가대표가 선발된다니 올림픽 메달보다 국가대표가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간다.

양궁협회는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공정성을 더 높였다. 기존 국가대표도 예외를 두지 않고 1차전부터 선발전에 참가하게 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 2관왕, 국가대표 장혜진조차 2차전에서 탈락했다. 코로나19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되자, 선수들의 컨디션을 고려해 선발전을 한 번 더 치렀다. 2020년에 올림픽이 열렸으면 어깨 부상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지 못했을 고교생 김제덕 선수가, 다시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해 올림픽 2관왕이 될 수 있던 비결이다.

한국 양궁의 올림픽 신화는 선수들의 피와 땀과 실력으로만 선발하는 공정한 시스템이 합작한 결과다. 지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국가대표조차 우대하지 않고, 오로지 기록 순으로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원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니 양궁협회의 뚝심이 대단하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는 근본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는 점에서, 양궁 국가대표 선발 과정은 공정이 흔들리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

198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세대인 ‘MZ세대’ 3명 중 2명은 “한국 사회가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국민일보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온라인 설문 조사에서 답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해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4%가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다. 국가와 사회 지도층이 입으로만 공정·정의·평등을 외치면서 모든 게 거짓과 위선으로 똘똘 뭉쳐 전형적인 내로남불 행태를 보인 탓이다.

엘리자베스 벨기에 공주는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자원입대해 훈련을 받는다. 많은 미국 대통령은 1, 2차 세계 대전, 월남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과 다르게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공정에 솔선수범한다. 불과 며칠 만에 수도 카불이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함락하고, 대통령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아프가니스탄 모습에서 공정과 정의가 실종된 나라의 마지막을 본다.

교육부가 발표한 대학기본역량진단 평가에서 ‘지역할당제’를 도입해 대학 전체를 한꺼번에 평가하지 않고 5개 권역으로 나눠 재정지원 대학을 선정해 반발이 심하다. 단순히 대학이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살아남고, 경쟁이 심한 수도권의 우수한 대학은 탈락했다고 한다. 양궁처럼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고려요소를 넣으니 수긍하지 않는다. 누가, 무슨 권한으로 우리 사회의 공정과 원칙을 이처럼 무참히 훼손하는지 답답하다.

무차별적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능력과 상관없는 자기편 챙기기식의 낙하산 인사, 편법과 비리가 판치는 학종입시, 정의보다 권력이 앞서는 시스템이 사회 곳곳에서 국가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말을 믿는 국민은 이제 거의 없다. 오히려 기회는 불평등하고, 과정은 불공정하며, 결과는 내로남불인 세상이 됐다. 한국 양궁의 공정한 시스템에서 나라가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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