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의 꿈
정호승(1950 ~ )
이슬은 사라지는 게 꿈이 아니다
이슬은 사라지기를 꿈꾸지 않는다
이슬은 햇살과 한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슬이 햇살과 한몸이 된 것을
사람들은 이슬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나는 한때 이슬을 풀잎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새벽길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슬은 울지 않는다
햇살과 한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 뿐
이슬에게는 슬픔이 없다
[시평]
옛 시인이 말하기를, 사람의 한 생애를 ‘여로창생(如露蒼生)’, 곧 풀잎에 잠시 맺혔다가 아침 해가 나면, 그 밝은 햇살로 인해 이내 사라져버리는 이슬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길고 긴 것 같지만, 실은 그 만큼이나 짧고 허무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잠시 풀잎에 맺혀 있다가는 이내 사라지는 이슬을, 결코 햇살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햇살과 한 몸이 되는 것이라고 노래한다. 햇살과 한 몸이 되어 이내 밝고 밝은 햇살이 되는 이슬. 이 얼마나 신나는 상상인가.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죽음’을 맞이해 이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또 다른 밝음의 세계를 맞이해, 밝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가 이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가. 사자(死者)에 깔아주는 천을 ‘명정(銘旌)’이라고도 쓰기도 하고, ‘명정(明旌)’이라고도 쓰기도 한다. 사자(死者)의 이름을 써놓은 천이라고 해서 ‘명정(銘旌)’이라고 하지만, 또 다른 밝음의 세계로 간다는 의미에서 ‘명정(明旌)’이라고 한 것은 아닌가.
그러므로 이슬이 밝은 햇살과 한 몸이 되듯이, 햇살과 한 몸을 이루는 기쁨만 있을 뿐이고, 이슬에게는 사라지는 슬픔이 없듯이, 우리네의 죽음도 결코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만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에는 담겨져 있다. 이슬이 햇살과 하나가 되어 밝음이 되듯이, 우리의 죽음도 결국은 또 다른 밝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윤석산(尹錫山)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