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 거목 월주스님이 별이 됐다. 가장 뜨겁다는 대서에 세수 87세로 입적했다. 월주스님은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와 함께 종교지도자 3총사로 불렸다. 고인은 1980년 17대 조계종 총무원장이 된 이후 신군부에 항거했다. 신군부가 전두환 지지성명을 요구했지만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하며 끝까지 불응했다. 그러면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봉행했다. 그해 10.27 법난이 터졌다. 신군부에 강제연행돼 죄수처럼 조사받았다. 이후 다년간 해외를 돌며 불교의 방향을 ‘깨달음의 사회화’로 정하고 종단개혁을 위해 힘썼다.

총무원장 시절 월주스님이 1980년 10월 7일자 동아일보에 게재한 ‘사회정의’란 제목의 칼럼은 당시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던 신군부 앞에서도 당당했던 종단 지도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월주스님은 “이기심은 인간을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노예가 되게 하고 나아가 참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는 옹고집의 어리석음에 사로잡히게까지 한다”면서 “자신의 인격마저 파탄에 빠지게 하는 이기심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정의는 발붙일 수 없다”고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차지한 신군부를 비판했다.

월주스님의 말년 행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10.27 법난 이후 종단개혁을 끊임없이 외치고,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 등과 함께 종교 간 화합에 힘썼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은 고인보다 17세, 강원룡 목사는 22세가 많았다. 종단도 다르고 연령차가 있음에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고인이 큰 그릇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월주스님은 종교 간 교류와 화합이 필요하다며 2008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사해사본과 그리스도교의 기원’ 전시장을 방문해 1시간가량 꼼꼼하게 전시물을 둘러봤다. 사해사본은 기독교 성경의 내용이 변질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 획기적인 성경 필사본이다.

이처럼 다름을 인정하고 품으려 했던 월주스님의 모습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따돌리는 지금의 종교계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야 할 종교계는 정권에 빌붙거나 정치권력화 돼 ‘사회의 가장 큰 걱정거리’로 전락했다. 그래서 더더욱 범인(凡人)을 이끌고 종교 간 화합에도 진심이던 월주스님과 같은 종교지도자의 빈 자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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