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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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이 탄생했다. 고종 황제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기치(旗幟)로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그런데 매관매직은 여전히 풍습이었다.

1898년 1월 11일에 일본 도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관은 본국에 보고했다(한국엔 공관이 없었다).

“한국의 한탄스러운 상황은 무엇보다 부패한 관료 계층에 그 원인이 있다. 관료들은 정부로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흡혈귀처럼 민중의 피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한국은 거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관료들에 의한 철면피한 강탈체계가 폐지돼야 비로소 조선의 새날이 밝아 올 것이다.” (박종인 지음, 매국노 고종, 2020, p253)

1899년 10월에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샌즈가 궁내부 고문관에 취임했다. 그는 대한제국이 러·일 양국의 대립에서 벗어나 스위스처럼 영세 중립국이 되려면 내정개혁이 급선무라고 정부 고관을 설득했다. 하지만 샌즈의 개혁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궁내부 관리들부터 부패했다. 특히 영친왕의 친모인 엄귀비는 샌즈의 개혁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샌즈는 1930년에 발간한 ‘조선비망록’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도 관직 임용에 뇌물 수수 관행이 너무 심해 이를 직업으로 삼는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까지 등장했다. 그들은 어떤 지방 관직을 얻는데 필요한 뇌물 준비금을 토지와 농산물 거래 때의 통상적인 이자인 월 12%로 후보자에게 빌려주고 공직을 얻은 뒤 짧은 기간 내에 되받아 냈다. 뇌물은 황제에게까지 올라가는 데 조선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뇌물을 그렇게 비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땅과 백성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곧 국가이다. 관리들은 황제의 징세 청부업자일 뿐이다. 지방행정도 부패했고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샌즈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비망록, 2019, p127~128)

한편 1900년 12월에 청나라 공사 서수붕은 귀국하면서 고종의 매관매직을 비웃었다.

“서수붕이 처음 고종을 뵈었을 때 조선의 기수(氣數)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고종이 의아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본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가 십 년도 되지 않았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귀국은 벼슬을 팔아먹은 지 30년이나 되었는데도 제위(帝位)가 아직 편안하니 기수가 왕성하지 않거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고종은 크게 웃으며 부끄러운 줄 모르자 서수붕이 나가면서 말했다.

‘불쌍하구나, 대한의 백성들이여’.” (황현 지음·허경진 옮김, 매천야록, 2006, p282)

또한 영국 국회의원 출신 해치는 1901년 무렵에 조선·일본·청나라를 방문한 뒤 쓴 ‘극동의 인상: 일본·코리아·중국’에서 조선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정부의 부패와 비효율은 오래전부터 뛰어넘기가 불가능한 지점 이상에 도달했다.… 조선의 관료는 이 나라의 생피를 빨아 마시는 흡혈귀다.” (조윤민 지음, 두 얼굴의 조선사, 2016, p178~179)

마치 영국의 비숍 여사가 1897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 나오는 ‘허가받은 흡혈귀’를 연상케 한다.

대한제국은 여전히 매관매직 폐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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