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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김응집(金應集)은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敎師)로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했는데, 본 칼럼에서 배화 학당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다.

배화학당은 1898(광무 2)년 10월 기독교 전파와 여성 교육을 목적으로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의 캠벨 선교사가 당시 한성 인달방 고간동(현 종로구 내자동)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처음에 캐롤라이나 학당으로 설립했다. 그 이후 1910(융희 4)년 4월 2일 배화 학당으로 교명(校名)을 개칭했으며 6개월 후에 남궁억(南宮檍)이 교사로 부임했는데, 1918년 건강 문제로 학교를 사직(辭職)하기 전까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民族意識)과 독립사상(獨立思想)을 고취(鼓吹)시켰다.

한편 1916년 1월 교사를 경성 누하동(현 종로구 필운동)으로 이전했으며, 1922년 4월 7일 배화여자 보통학교가 총독부로부터 6년제 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1925년 4월 30일에 배화여자고등 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이와 관련해 배화여자고등 보통학교로 인가받은 지 13년 후가 되는 1938년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 개편됐다.

그러나 배화고등여학교에 위기가 닥쳐왔으니 일제가 신사참배(紳士參拜)를 강요했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하여 교사들이 탄압을 받게 돼 1940년 선교사들이 대부분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경영난이 심화되어 폐교 위기에 처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 독지가의 도움으로 폐교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개칭하였으나 1945년 9월 폐교하여 재학생들을 종로초등학교에 배속시켰다. 배화고등여학교는 1946년 배화여자중학교로 개편됐으나, 6·25전쟁 기간이었던 1951년 8월에 배화여자중학교와 배화여자고등학교로 분리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배화학당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했는데, 김응집이 언제부터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게 된 것인지 그 경위는 모르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로서의 구체적인 행적을 살펴본다. 김응집은 3·1운동에 교사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후 지하신문(地下新聞)을 통하여 일제에 저항했는데, 구체적으로 그는 자택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국민신보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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