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공광규(1960 ~  )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평]

어린 시절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의 우상도 영웅도 아님을 알게 된다. 아버지도 다만 한 사람의 사회인, 그런가 하면 우리들을 위해 어떤 어려움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그저 평범하며, 나아가 어찌 보면 안쓰러운, 심하게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분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어느 날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그 바람에 의하여 구슬픈 소리를 내는 빈 소주병에서 발견을 한다. 빈 소주병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주를 좋아하시던, 그러면서 늘 그 소주의 힘에 의지하여 사시는 듯한 가여운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 빈 소주병은 아버지로 환치된다.

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 바람소리인 듯, 아닌 듯, 들리는 듯하여 나가보니, 아버지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계신 듯, 덩그마니 놓여 있는 빈 소주병. 우리의 일상 속에서, 우리를 위하여 늘 자신을 비워내야만 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시인은 쓸쓸히 버려진 빈 소주병에서 발견한다. 쓸쓸하고 이제는 속을 다 비워버린. 

윤석산(尹錫山)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