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금속활자입니다.”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문화재청과 (재)수도문물연구원은 이처럼 밝히며 그 가치에 깜짝 놀라했다. 조선의 과학 기술의 실체를 공개하는 날인만큼 관계자들의 표정도 사뭇 진지해보였다.
문화재청과 (재)수도문물연구원에 따르면, 옛 한양 중심부인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평동 땅속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있는 형태로 발견됐다.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 발견
발견된 금속활자는 크기와 형태, 뒷면 깎음세, 서체 등의 조형적 특징이 다양하게 확인됐다. 15세기에 한정해 사용된 한글 형태의 활자도 출토됐다. 일부 활자들은 화재 등의 상황으로 엉겨 붙어 있었다.
관계자는 “한글의 사용 시기에 근거해 조선 전기로 판단할 수 있는 활자들이 출토된 점, 다수의 공반 유물이 16세기에 제작된 점으로 볼 때 조선 전기에 제작돼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점 등을 높이 평가된다”고 말했다. 이어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자해(145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은 유례없는 성과”라고 밝혔다.
추정 ‘갑인자’가 추후 연구를 통해 ‘갑인자’로 확인되면 조선시대 금속 활자로서 각종 사료 및 기록과 일치하는 중요한 실물자료가 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시기(1450년경)보다 이른 시기의 조선활자 관련 유물은 인쇄본으로만 전해졌으나 최초로 인쇄본과 금속활자를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다. 또 조선 전기의 인쇄본으로만 확인되던 여러 활자들의 실물이 추가로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실체 전하는 것 전무해
또한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籌箭)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려진 상태로 출토됐다. 동제품은 동판(銅板)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된다.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되며,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 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
관계자는 조선시대 자동물시계의 주전은 그동안 실체가 전하는 것이 전무했으나 최초로 관련 유물이 발견됐다며 현재 복원된 자격루와 보완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됐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도 있다.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했다. 종신의 상단에 ‘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는 예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35년(중종 30) 4월에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계자는 “출토된 금속유물은 모두 의도적으로 매납한 것으로 보이는데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소증자총통이 시기가 가장 늦은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이 1588년인 점으로 볼 때, 1588년 이후 매납되었다가 잊혀져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묻힌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