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대법원. ⓒ천지일보 2018.7.31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대법원. ⓒ천지일보 DB

‘성소수자 페미니스트’ 이유로 현역병 입대 거부

1심은 유죄… 이후 헌재·대법서 유리한 판결나와

2심 “신앙·신념, 내면에 분명한 실체” 무죄 선고

여호와의 증인 외 종교인 무죄 확정은 이번 처음

[천지일보=홍수영 기자] 비폭력·반전주의 신념과 종교적 신앙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30대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여호와의 증인 이외의 종교인이 현역병 입영 거부로 무죄를 확정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24일 병역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모씨(32)의 상고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깨고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신념과 신앙이 내면 깊이 자리 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원심의 판단에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병역법 제88조 제1항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정씨는 지난 2017년 10월 같은 해 11월 14일까지 입영하라는 서울지방병무청장 명의의 현역 입영통지서를 전달받고도 정당한 사유 없이 정해진 날까지 입영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정씨는 성소수자로, 고등학교 때부터 획일적인 입시교육과, 남성성을 강요하는 또래 집단문화에 반감을 느꼈다. 이후 기독교 신앙을 시작했고, 대학 입학 후 선교단체 등에서 ‘용산 참사 문제 해결 1인 시위’ 등에 참여하면서 타인에 대한 폭력을 전제하는 군대와 기독교 교리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페미니즘도 접하면서 성소수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퀴어 페미니스트’로 규정했다. 이에 다양성을 파괴하고 차별과 위계로 구축되는 군대 체제 및 생물학적 성으로 자신을 표준 남성으로 규정짓는 국가권력을 용인할 수 없다며 병역 거부를 결심했다.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쟁없는세상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동문 앞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 거부 관련 대법원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군대 입영을 거부하는 것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므로 형사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은 지난 2004년 종교적 신념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유죄를 선고한지 14년 3개월 만에 변경되는 것이다. ⓒ천지일보 2018.11.1
[천지일보=남승우 기자]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쟁없는세상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018년 11월 1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동문 앞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 거부 관련 대법원 결정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군대 입영을 거부하는 것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므로 형사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은 지난 2004년 종교적 신념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유죄를 선고한지 14년 3개월 만에 변경되는 것이다. ⓒ천지일보 2018.11.1

2018년 2월 1심은 정씨의 입영 거부가 대법원 판례와 헌법재판소 결정을 예로 들며 병역법상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정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헌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고 결정하고, 11월 대법원이 “종교·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법 제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결국 정씨 사건 2심은 “피고인은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과 소수자를 존중하는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비폭력주의와 반전주의를 옹호하게 됐고 그에 따라 병역의무의 이행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여러 사정을 종합하면 피고인의 신앙과 신념이 피고인의 내면 깊이 자리 잡혀 분명한 실체를 이루고 있어 피고인이 진정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 재판부가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무죄를 그대로 확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판결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비폭력주의·반전주의 신념과 신앙을 이유로 현역병 입영을 거부한 사안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수긍한 최초 판결”이라며 “일반적으로 종교적 신념에 기한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의 병역거부 사안이었다”고 강조했다.

앞서 올해 2월 25일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닌 사람이 비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예비군훈련 등을 거부한 사안에서 무죄가 선고된 적은 있으나 현역 입영 거부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사건 피고인은 대한성공회 교인으로서 비폭력주의·반전주의 신념과 기독교 신앙 등을 병역거부 사유로 주장하고 있다”며 “피고인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아닐 뿐만 아니라 단순히 기독교 신앙(교리)만을 근거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은 기존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 사안과는 구별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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