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총검(보존처리 후 상태). (제공: 서울시) ⓒ천지일보 2021.6.23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총검(보존처리 후 상태).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21.6.23

서울역사박물관, 동대문운동장 발굴 조사때 출토

[천지일보=양효선 기자]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下都監) 터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존 처리하고 추가 조사한 결과, 19세기 말 국내에 들여온 근대식 소총에 사용한 총검으로 확인됐다고 23일 밝혔다.

최근 실시된 보존처리 과정에서 칼의 전체적인 형태와 총검의 MRD(Muzzle Ring Diameter) 크기를 정밀 측정 결과로 볼 때 조선 후기인 19세기 중반 영국에서 개발된 소총에 사용된 총검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 총검(銃劍)은 보존처리 전까지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과 관련된 일본제 칼(刀)인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었다.

1882년 이전 하도감 터는 조선시대 훈련도감의 분영인 하도감이 있던 자리로, 1881년에 설치된 신식 군대인 교련병대 즉 별기군이 훈련한 장소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현장이며, 군란의 원인으로 지목된 별기군이 해체된 이후에는 군란을 진압한 청군(靑軍)이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에 패하기 전까지 주둔했다.

하도감 출토 총검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진 ‘엔필드(Enfield)’와 ‘스나이더-엔필드(Snider-Enfield)’ 소총은 각각 1853년과 1866년에 영국에서 처음으로 제작됐다.

이전까지 19세기 말 근대식 소총에 사용된 총검이 출토된 사례는 인천 앞바다에서 침몰한 ‘고승호’에서 인양된 총검이 유일한데, 이는 청나라 군대가 사용한 것이라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고승호(高陞號)는 청나라 군대의 병력 수송선으로 청일전쟁 시기인 1894년 7월 25일 인천 앞바다에서 조선에 병력을 상륙시키기 못하고 일본 군함에 공격을 받고 침몰한 배이다.

이 총검은 전장 71.6cm, 도신 57.5cm, 자루 13.5cm 크기로 손잡이는 동물성 가죽을 사용해 제작됐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건설을 위해 2008∼2009년 동대문운동장을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토됐다.

영국에서 19세기 제작된 엔필드 소총.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21.6.23
영국에서 19세기 제작된 엔필드 소총. (제공: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 2021.6.23

이번에 하도감 터에서 출토된 총검은 중국 또는 일본을 통해 19세기 말 국내로 유입돼 조선군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서양식 총검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될 것으로 박물관 측은 전했다.

19세기에 들어온 근대식 소총과 그와 관련된 유물들은 두 번의 수난 즉 일제가 조선 정부를 앞세워 1907년 반포한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과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시행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병기류 양여 및 처분’으로 대부분 소실되어 사라졌다.

조선총독부박물관 병기류 양여 및 처분은 1941년 8월 조선총독부가 태평양 전쟁에 사용할 목적으로 공포한 ‘금속 회수령’을 근거로 1944년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 무기류를 공출해 1600여점을 녹여서 무기로 제작한 사건이다.

총포급화약단속법(銃砲及火藥團束法)은 1907년 일제가 순종황제로 하여금 반포토록 한 법으로 같은 해 강제적으로 해산시킨 대한제국군의 해산군인들이 무기와 탄환을 탈취해 의병전쟁에 합류하자 의병들의 저항을 막고 무기류의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기를 압수하고 폐기한 사건이다.

박물관 측은 이 총검을 동대문역사관(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서 상설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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