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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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단명(高枕短命)’이란 베개를 높이 베면 목숨이 짧다는 뜻이다. 베개를 높이 베면 건강에는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아지면 화가 미친다는 뜻으로 사용된 사자성어다.

송나라 정이천(1033~1107년)은 사리 판단을 잘하는 학자였다. 그는 젊은이가 일찍 출세하는 것을 세 가지 불행 중 으뜸으로 꼽았다.

‘인간에게는 삼불행이 있다. 첫째 어린 나이에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 둘째 부형의 군세에 힘입어 좋은 벼슬을 하는 것, 셋째는 뛰어난 재주로 문장에만 능숙한 것이다(伊川先生言, 人有三不幸. 少年登高科, 一不行, 度父母弟之勢爲美官, 二不幸, 有高才能文章, 三不幸也).’

조선 세조 때 청년장군 남이는 이시애 난을 평정하고 26세에 공조판서에 올랐다. 반년 뒤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하고 한 달 뒤에는 병조판서에 발탁됐다. 벼락출세 뒤에 오는 불행을 예견이나 했을까. 그가 지은 유명한 북정가(北征歌)는 호방한 기상이 넘치지만 이 시로 인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하리/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면/ 후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고 있는데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무심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 그때 옆에 있던 간신 유자광(柳子光. 병조참지)이 역모를 계획하고 있다고 고변했다. 호연지기로 지은 ‘북정가’도 증거물로 채택 됐으니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남이는 즉시 체포됐으며 혹독한 국문을 견디다 못해 결국 시인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남이의 죽음으로 가족들은 풍비박산되고 딸마저 한명회의 가노가 됐다.

역시 젊은 나이에 출세를 하고 38세 비명에 간 인물은 중종 때 사림파를 대표했던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아닌가. 정암과 함께 국가를 개혁하려 했던 동지 충암 김정(冲庵 金淨)도 귀양지인 제주에서 사약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30대 중반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나이였다.

두 사람은 오늘날까지도 사림들의 숭앙을 받고 있지만, 조급한 개혁으로 큰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기는 시각도 있다. 율곡 이이도 선조에게 헌정한 글에서 조광조에 대해 고침단명을 애석하다고 평했다.

‘정암의 출세가 너무 빨라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성급하기만 했습니다.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기본을 삼지 않고 겉치레만을 앞세웠습니다.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다가 고변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사기(士氣)가 끊어지게 돼,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나이다(의역).’

30대 청년 이준석씨가 국민의힘 대표로 당선됐다. 첫날부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국민들 사이에서 이 대표를 보는 시각은 긍정과 부정으로 엇갈리고 있다. 국민들은 야당의 환골탈태를 바라는 것 같다. 그가 어떤 리더십으로 야당을 추슬러 민심을 이끌지는 미지수다. 계보 조직이 복잡한 야당이 잘 굴러갈지도 모를 일이다. 의욕이 넘쳐 매사 서둘지 않았으면 한다. ‘고침단명’이 되지 않는 젊은 지도자로서 역량을 갖춰야 나중에 대권도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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