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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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59년, 진(秦)이 상당을 평정한 후 군사를 나눠 왕흘(王屹)에게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의 동쪽 피뢰(皮牢)를, 사마경에게 태원(太原)을 공격하게 했다. 한(韓)과 조(趙)는 소대(蘇代)를 진의 범수(范睢)에게 파견했다. 소대(蘇代)가 범수에서 물었다.

“무안군 백기(白起)가 마복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사로잡았습니까?” “그렇소.” “곧 한단을 포위하겠군요?” “그렇소.”

“조가 망하면 진왕은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됩니다. 무안군은 70여개의 성을 탈취했습니다. 옛날 주공(周公), 소공(召公), 여상(呂尙)보다 더 공이 큽니다. 공의 지위는 무안공보다 낮아집니다. 진이 한을 공격하여 형구(邢丘)를 포위했을 때 위협을 느낀 상당의 군민들은 진에 투항하지 않고 조로 귀순했습니다. 천하의 백성들이 진에 투항하는 것을 꺼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진이 조를 멸망시키면, 북방은 연으로 귀순할 것이고, 동방은 제로 귀순할 것이며, 남방은 한으로 귀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은 무엇을 얻습니까?”

문득 느끼는 바가 있던 범수는 진왕을 만나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우리 군대는 너무 지쳐있습니다. 한과 조에게 일부의 땅을 받는 조건으로 강화하고 군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허락을 받은 범수는 강화를 맺고 작전을 종결했다. 백기와 범수의 사이가 나빠졌다. BC258년 9월, 진의 왕릉(王陵)이 한단을 공격했다. 마침 병에 걸린 백기는 출전하지 못했다. 왕릉은 5명의 장수를 잃었다. 진왕이 백기를 불러서 의견을 물었다. 백기는 사양했다.

“한단을 공략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를 원망하던 제후들이 속속 한단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우리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나라를 비우고 산과 강을 넘어 다른 나라의 수도를 치는 것은 위험합니다.”

진왕이 다시 명했지만 백기는 끝까지 사양하다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진왕은 왕흘을 파견했지만 초의 춘신군과 위의 평원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백기는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다. 화가 난 진왕이 억지로 출전하라고 명했지만 백기는 꼼짝하지 않았다. 범수까지 나서서 지난 허물을 사과하며 출전하라고 권했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진왕은 백기를 사병으로 강등시키고 유폐시켰다. 3개월 후 제후들의 연합군이 진군을 격파했다. 진왕은 백기를 함양에서 내쫓기로 결정했다. 서문을 나가 두우(杜郵)에 이르렀을 무렵 진왕이 보낸 사신이 달려와 칼을 주며 자결하라고 명했다. 죽기 전에 백기는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범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결국 목을 찔러 죽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하다. 장평에서 항복한 조의 군사 40만명을 속여서 생매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죽기에 넉넉한 죄가 아닌가?”

진의 백성들은 그의 억울함을 애석하게 여겨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마천은 백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세상에는 자(尺)도 짧은 곳이 있고 치(寸)도 긴 곳이 있다고 한다. 백기는 적을 잘 간파하고 음기응변에 능하여 기이한 계책을 잘 활용했다. 그러나 범수가 자신을 노리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는 법이다.”

사마천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천적을 내는 것이 역사의 법칙을 넘는 자연의 법칙이다.

백기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있었지만, 그를 제어하는 정치적 능력을 지닌 범수라는 라이벌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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