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유람만 50년 이상… 관객도 ‘얼씨구’
일흔 넘긴 나이에 ‘정선아리랑’ 연주법 개발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재담천하 김뻑국, 강산유람 구경을 가세, 구경을 가세. 이강산 삼천리, 구경을 가세 구경을 가세.”
재담가 김뻑국(75) 씨. 요즘 세대에겐 낯설지만 50대 이상에겐 추억의 인물이다. 그가 공연을 펼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동네 주민들이 모여들었다. 70~80년대엔 만담과 재담이 큰 인기를 끌었다. 김 씨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였다. 하지만 고춘자와 장소팔 등 같이 활동했던 만담가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개그가 인기를 끌면서 재담과 만담은 대중에게 점점 멀어졌다.
종로3가에 위치한 ‘김뻑국 민속예술단’을 찾았다. 그곳엔 김 씨의 제자 김순녀(54) 씨 외 1명이 소리 연습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예술단에서 만난 김 씨는 무대에서의 익살스러운 모습과 달리 신사적이었다.
김 씨는 반세기가 넘게 팔도강산 유람기를 우리 가락으로 읊고 있다. 그의 익살스러운 재담은 6.25전쟁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다. 관객은 이러한 재담에 ‘얼씨구’ ‘좋다’ 등 다양한 추임새를 넣는다.
본명은 김진환이다. 예명 ‘뻑국’은 60년대 초 방송 데뷔 때 뻐꾸기 효과음을 잘 낸다는 이유에서 붙여졌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일본이다. 한국으로 건너온 것은 열 살 때다. 당시 원폭투하를 목격한 가족은 고향 충남 보령으로 돌아왔다. 한국어가 서툴렀던 그는 학교에서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초등학교 과정을 다 밟지 못한 채 기차를 탔다. 도착한 곳은 서울역이었다.
김 씨는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선생 밑으로 들어가 1년 반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용인으로 피란했다. 1953년 다시 상경한 그는 탑골공원에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선생을 만났다. 최 선생에게 장구와 피리를 배웠다. 이후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약 30년간 같이 지냈다.
김 씨는 자신이 유명세를 탈 수 있었던 것으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의 인연을 꼽았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이 부장은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임을 열었다.
“이은관 선생님과 함께 종로3가의 어느 식당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김지미 등 당대 유명 가수들이 있었습니다. 부장님은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켰었죠. 전 그때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민요풍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때 이 부장은 ‘옳다구나’하고 김 씨에게 100만 원 정도하는 수표를 건넸다. 당시 100만 원은 집 한 채 가치였다. 그는 이 돈으로 자신의 이름이 내걸린 예술단 ‘김뻑국예술단’을 설립했다. 이후 재담과 소리 연구에만 집중하고 있다.
일흔을 훌쩍 넘긴 김 씨는 ‘정선아리랑’ 연주를 개발했다. 연주법, 연출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여전히 샘솟고 있다. 여느 청년보다 빠릿빠릿하고 열정적이다. 김 씨는 지금도 자신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12년 전에 중풍으로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살게 됐습니다. 이후 재담과 소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2의 인생이 아깝지 않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