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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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이번 방미에 대해 “최고의 순방이었고, 최고의 회담이었다”라고 했다. “건국 이래 최대의 성과”라는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도 대체로 긍정적 평가이다. 보수언론들도 한미동맹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직후 공동 기자 회견에서 문 대통령은 미국 기자의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의 대만에 대한 태도에 대해 좀 더 강력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압박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압박은 없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공동성명에는 미국의 ‘쿼드 언어’가 여기저기 포함돼 있다. 최근까지 한미 양측이 대북 및 대중 접근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여 왔던 점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이다.

이번 공동성명에서 여권이 평가하는 대목은 ‘판문점 선언 등 남북합의 존중’ ‘남북대화 지지’ ‘북한 비핵화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 목표 확인’ ‘싱가포르 선언에 기초한 북미 대화 추진’ ‘미사일 지침 종료’ ‘백신 협력’ 등이다. 그런데 공동성명에는 이제까지 문재인 정부가 꺼려 왔던 문구도 들어가 있다. ‘쿼드 등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포용적인 지역 다자주의의 중요성 인식’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저해, 불안정 또는 위협하는 모든 행위 반대’ ‘포용적이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 유지’ ‘남중국해 및 여타 지역에서 평화와 안정, 합법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상업 및 항행・상공비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 존중’ ‘대만해협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 강조’ 등이 그러한 문구들이다. ‘중국’이란 단어 없이 사실상 중국을 겨냥하는 내용이며 특히 쿼드는 그대로인데, 쿼드의 성격에 대한 한국의 이해가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까지 쿼드의 대중 견제 성격을 배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한국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3월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의 때 대북 및 대중 입장을 둘러싼 양측 간 냉랭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한미관계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태도 변화이다.

이와 관련해 27일 정당 대표 초청 청와대 간담회에서 안철수 대표는 “정상회담 결과가 정부의 기존 외교·안보 정책과 확연히 다른데 정부가 충분히 예측하고 준비한 대로 결과문이 나온 것인가”라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했는데 문 대통령의 답변을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번 정상회담 공동성명 문안은 한국이 남북관계에 대해 원하는 문구만 들어간다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 나온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안 대표의 말처럼 “민주당의 입장과 이번 정상회담 결과문이 다른데 정상회담 합의대로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길 의지가 있는지 물었는데 답을 듣지 못했다”라는 데 있다. 정부 인사들이 대만해협 관련 내용을 ‘매우 원론적이고 원칙적인 내용’ 또는 ‘일반적인 문장’이라고 하고, 한미가 반도체· 배터리·5G 등에서 협력을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특정국 배제가 아니다’라고 하는 등 중국에 ‘변명’하는 듯한 설명을 했다. 심지어 공동성명에 “중국을 적시하지 않았으니 중국이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대중국 정책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인가? 속마음은 달라진 것이 없고 현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려고 단지 말로만 미국의 입장에 부응한 것인가?

외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이다. 신뢰는 언행으로 평가된다. 한미 공동성명에 북한과 관련해 넣고 싶은 내용을 넣기 위해 미국의 문구를 수용하고 귀국해서는 딴소리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처신은 중국에는 어설픈 변명이 될 것이고 미국에는 의구심을 갖게 할 것이다. 중국은 관영 매체를 통해 “한국은 한중 관계의 차질을 막기 위해 실질적인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고, 미국은 정상회담 직후 한국을 지목해 ‘쿼드 문이 열려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간 외교부는 미국이 쿼드 참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해 온 적이 없고 그래서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답변해 왔다. 개인 사이에도 중요한 모임을 준비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고 초청장을 보내지 않는가? 초청장은 한국이 물밑 대화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안 보내고 있는 것인데 초청장이 안 왔으니 검토할 필요가 없다고 답하는 것은 한 마디로 고단수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나라 모두와 ‘절친’이 될 수는 없다. 문재인 정부의 갈팡질팡하는 처신 때문에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박쥐’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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