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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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국정원장의 최근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먼저 타이밍부터 묘하다. 지난 12일에는 일본에서 한․미․일 3국 정보기관장이 만났다. 한반도 정세와 대북정책 등을 논의했다. 그 직후에는 헤인스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방한해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했다. 헤인스 국장은 비무장지대(DMZ)도 직접 방문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미국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그간 문 대통령이 펼쳤던 대북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비록 외교적 언술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로 북한도 선호하는 협상파 성 김을 임명했다. 그로부터 닷새 뒤, 이번에는 갑자기 박지원 원장이 방미 길에 오른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불과 보름 새, 숨 가쁜 대북정책 조율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사람의 문제다. 당초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결국 ‘오바마 행정부 시즌2’가 재연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많았다. 아니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 지우기’가 본격화되면서 북미 간에 다시 지루한 힘겨루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달랐다. 비록 원론적 언급일지언정 이전까지 축적돼 왔던 남․북․미의 협상과정과 그 성과를 존중했다. 그리고 다시 논의해보자는 메시지도 남겼다. 특히 성 김 대표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북핵과 관련해서 실질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최대 변수는 북한이 여기에 어떻게 화답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좀 더 심도 있게 들여다봐야 한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크게 당한 북한이 미국을 쉬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전향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좀 더 정교한 미국의 대북 입장, 특히 북핵 로드맵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선행돼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그런 로드맵을 들고 직접 북한을 찾기에는 대내외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다. 그리고 북․미간에 예비적인 조율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와 협상이 진전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힘겨루기로 이어지거나 시간만 보낼 수도 있는 일이다. 따라서 누군가 제3자가 돼서 최적의 조율자 역할을 한다면 금상첨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한반도 운전자론’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배경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 임기라야 이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차기 대선을 고려하면 길어야 연말까지, 약 6개월 정도 국정운영 키를 쥘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이 바쁘다는 얘기다. 특히 문 대통령은 북핵협상의 새로운 돌파구를 어떻게든 만들어 보고 싶을 것이다. 임기 초부터 그렇게 매달렸던 북핵협상이 아직도 뚜렷한 성과가 없으니, 문 대통령에게는 통한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비록 시간이 충분치는 않지만, 임기 말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축제’를 만들어 낼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는 얘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냥 ‘북․미 대화’만 촉구할 게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프로세스 위에서 다시 ‘운전대’를 잡는 일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힘을 실어줬다. 김정은 위원장도 이 기회를 외면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재자의 역할을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할 것인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셈이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뉴 페이스, 박지원 국정원장이 나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과 북한을 동시에 박 원장만큼 꿰뚫고 있는 인물도 흔치 않다. 더욱이 북한 김정은 위원장도 박 원장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다. 잘 만 된다면 역사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이다. 바로 그 박 원장이 일체의 언급도 없이 조용히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물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설사 그 무엇을 쥐고 온들 북한이 틀어버리면 역시 허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북․미 모두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의미를 조금 더 강조한다면 ‘역사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보통 이런 시점을 ‘골든타임’이라고 부른다.

이제 박지원 원장의 귀국 이후가 더 궁금해진다. 좀 더 분명한 대북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곧 한국전쟁 발발 71주년도 다가온다.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치가 다시 높아질 것이다. 서울을 방문한 헤인스 미 국가정보국(DNI)이 수행원들과 함께 DMZ를 찾은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남북의 허리를 가르고 있는 대결과 적대의 상징, DMZ를 어떻게 할 것인가. 헤인스 국장의 의도와 이를 확인한 박 원장이 서둘러 미국을 방문한 것이 맞물리면서 묘한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다.

벌써부터 언론에서는 성 김 대표의 북한측 상대역을 누가 맡을지도 관심을 끌고 있다. 물론 북한 입장은 나와 봐야 알 수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선희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꼽고 있는 것도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성 김 대표와 최선희 부상은 2018년 1차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발표된 ‘싱가포르 합의’의 주역이다. 다시 만날 경우 서로가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신뢰관계가 확인된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싱가포르 합의’를 언급하고, 또 성 김 대표를 지명한 것 자체가 외교적 상상력을 더해 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DMZ에서 ‘세계적인 이벤트’가 열리는 것은 아닌지, 냉전체제의 마지막 철조망을 걷어내는 ‘역사적 사건’이 조만간 가시화되는 것은 아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한바탕 꿈이어도 좋다. ‘붉은 악마들’도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어떤 꿈인들 애써 탓할 필요는 없다. 그 꿈의 연장에서 별 얘기도 없이 떠난 박지원 원장의 귀국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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