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이미지(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서당 이미지(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고구려 ‘경당’에서 시작한 평민교육

마을에서 덕망 있는 자가 훈장 맡아

일제강점기, 민중 계몽에 힘쓰기도

[천지일보=이예진 기자] 가정의 달 5월.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부부의 날까지 5월에 있어 가족 간의 화합과 사랑을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5일 스승의 날은 언뜻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군사부일체’라고 해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는 같다”고 했으며 지나가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나라의 중심이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기 때문이며 그만큼 교육은 미래의 국가를 위한 일이기에 스승은 중요한 위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학교에서 모두가 공통된 교육을 받지만 과거에는 어떻게 교육을 진행했을까.

◆ 평민교육을 위한 서당

우리에게 친근한 ‘서당’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으나 그 처음은 고구려의 ‘경당(扃堂)’이다. ‘신당서’에 보면 “고구려인은 학문을 좋아했다. 궁리의 시가에 이르기까지 또한 서로 학문을 힘써 권하며 큰길가에 모두 장엄한 집을 짓고 경당이라고 이름했다. 미혼의 자제가 무리지어 거처하며 경전을 일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적혀있다. ‘구당서’에도 신분이 낮은 형문이나 시양과 같은 자들도 경당에 다녔다는 기록이 적혀있어 고구려의 ‘경당’은 귀족 자제들을 위한 것보다 평민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경당에서 유교 경전의 교육이 진행된 것으로 보아 경당은 고구려 국립교육기관인 ‘태학’이 설립되는 372(소수림왕 2)년 이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경당으로 시작된 평민교육은 고려시대 ‘십이도’와 ‘서당’으로 이어졌다. 십이도는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과 같은 수준으로 과거준비교육을 했고 서당은 훈장이나 학동의 능력에 따라 기초 문자 교육부터 주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진행됐다. ‘고려도경’에는 “마을 거리에는 경관과 서두가 두 개, 세 개씩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민간의 미혼자제가 무리를 이뤄 선생에게 경서를 배우고 좀 성장하면 유(類)대로 벗을 택해 사관(寺觀)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오·동치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고 적혀있다. 이를 통해 고려의 서당은 풍족한 집안에서 독선생(獨先生)을 앉혀놓고 이웃의 자제들을 동석시켜 수업하거나 향중의 몇몇 유지나 마을 전체가 함께 훈장을 초빙해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운영됐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사설교육기관으로 서원과 서당이 함께 발전했다.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 만들어진 후 곳곳에 뛰어난 유학자 등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이 생겨났다. 서원에서는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교육적인 기능보다 제사의 기능이 더 커졌다. 서당은 16세기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확대됐는데 ‘향약보급운동’으로 인해 향촌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사림이 서당 설립을 주도했으며 서당을 통해 유학적 질서를 향촌사회에 보급하고 정착시켰다. 이후 등장한 향촌서당 역시 이전과 동일하게 과거 준비를 위한 교육을 진행했으며 한문의 독해력 및 유학의 기초 경전의 지식을 이해하고 순수한 동몽교육 및 예의범절 교육도 진행됐다.

◆ 훈장과 학생

대부분 서당은 작은 규모로 이뤄졌다. 대부분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인 훈장은 서당마다 1명씩 있었고 규모가 큰 경우에는 학생들 가운데 나이와 학식이 우수한 자를 ‘접장’으로 세워 훈장의 감독 하에 지도하도록 했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은 5~6세의 아동들이 중심이었지만 20세 안팎의 나이대도 있었기에 접장은 훈장에게 직접 수업을 받으면서 자신이 속한 접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보수는 없어도 학비가 면제됐다.

훈장은 일정한 자격이 필요한 위치는 아니었으나 마을에서 학식이 있고 덕망 있는 자가 맡았다. 18세기 이전까지는 향촌사회에서 명망 있는 사족들이 직접 서당을 운영했기에 훈장에 대한 지위나 대우가 좋았다. 그래서 마을 잔치 등이 열리면 훈장을 모셔서 대접했으며 서당의 운영비나 훈장 가족의 생활비까지 학부형이 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사족이 아닌 중인과 같은 계층이나 몰락한 지식인들이 ‘직업적인’ 훈장으로 나타났다. 이에 훈장의 학식은 천차만별이었으며 경(經)·사(史)·자(子)·집(集)에 두루 통한 훈장이 드물었고 주석과 언해를 참고해 겨우 뜻을 해득할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신분질서가 무너졌고 전통 윤리관이 변화하면서 따라오는 변화였다. 이에 훈장에 대한 사회적 대우도 낮아졌다.

조선 말기로 접어들면서 서당교육은 쇠퇴했다. 이러한 쇠퇴를 막고자 유형원·정약용 등은 교육체제일원화를 논의했다. 사학이었던 서당과 서원을 관학에 흡수시켜 학제를 계열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재정과 관료조직의 성격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19세기 말 근대 교육이 도입되면서 ‘개량서당’이 등장했다.

개량서당은 근대교육을 도입해 민중들의 계몽에 함께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1918년 ‘서당규칙’을 공포해 서당 개설을 막았다. 일제에 의해 점차 없어진 서당은 광복 후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학제가 정비되는 과정에 소멸돼 갔다. 초등 이전의 교육을 맡았던 서당의 교육기능 역시 학교로 옮겨졌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자 교육과 전통적 윤리교육을 하는 곳으로 바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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