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면 천지일보 편집인.

3년 전 이맘때가 생각난다.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온 지구촌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듯 싶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평화의 물결로 뒤덮였고, 남과 북의 대결은 끝이 나고 평화는 그렇게 찾아오는 것만 같았다.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이 함께 일궈낸 ‘4.27 판문점 선언’, 두 정상이 상호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이어 두 정상은 도보다리를 거닐며 회담이 진행되면서 남북 평화무드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외신들은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무드를 자국에 속보로 긴급 타전하기에 바빴고, 국민들은 약 70년 만에 찾아온 평화무드에 한껏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두 정상 간의 평화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실무협상이 급진전 돼갔으며 크고 작은 많은 성과를 일궈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과 북의 문제는 남과 북만의 이해관계를 넘어 주변국과 강대국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실타래같이 얽혀 있었고, 자국의 이해득실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난항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북 정상 간의 평화에 대한 약속은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했고, 남북문제 이전에 국내 상황마저 녹록지 않게 되므로 급속하게 남과 북의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2020년 6월 16일 14시 49분, 남북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평화실무를 이어가던 개성공단에 위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폭탄에 의해 폭파되고 말았다.

평화의 전당은 3초간의 굉음과 함께 북의 일방적 소행으로 폭파됐으니, 남북평화협약(약속) 역시 그렇게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까지 침묵과 반목이 이어지며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이러한 가운데 남북 판문점회담 3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과 당국에선 꺼져가는 평화의 불씨를 살려보겠노라 애쓰는 모양이 애절해 보이기까지 하다.

공든 탑이 무너지고 있는 데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그 답답함이 이해는 간다.

그 답답함의 표시라 할까 조급함의 표시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북미 대화 내지 접촉할 것을 지나치게 강요한 나머지 미 정가에선 압박으로까지 인식될 정도라며 부정적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심지어 미국 유수의 언론들은 문 대통령의 태도에 자칫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보도를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문재인 정권 말기, 많은 악재들이 고개를 들고 있는 가운데 남북문제와 외교관계마저 레임덕을 피해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이럴 때 적용되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는 사람의 약속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 평화는 신(神)의 영역일 뿐 사람과 외교와 정치와 군사 등 절대성이 없는 가변성으로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차에 언급했지만 평화는 신의 영역이므로 평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신이 정한 때와 기한과 사람이 있다는 점을 제발 깨닫자.

신이 주신 경서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전 3:1)”라는 가르침이 있고, 또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는 가르침이 있다. 지금까지 지구촌엔 다툼과 분쟁과 전쟁이 없던 때가 없었다. 전쟁을 좋아하고 평화를 싫어할 리는 만무할 텐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매사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면 그 전쟁의 원인이 도대체 뭘까.

그런데 전쟁의 원인도 아는 이가 있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답을 가진 이가 있다.

평화가 신의 영역이라 했다면, 그 신의 뜻을 받은 이 시대 하늘이 택한 한 사람 곧 천택지인이 있다는 사실을 수차에 밝히고 강조해왔다.

왜 들으려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 한반도가 낳은 작은 거인이 있다. 그러나 그를 낳은 이 땅은 그를 귀히 여기질 않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무리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선 배척을 받는다”고 했지만 말이다.

지구촌을 31바퀴를 돌고 돌며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다 함께 하자고 외칠 때 모두가 그의 앞으로 나와 하나 되어 가고 있으니 현실이고 실상이다. 그 평화의 사자이자 작은 거인 노신사는 이 순간도 외치고 있다. 안 들리는가.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었단 말인가.

왜 매일 같이 알리고 전하는 평화의 행전을 무시하고 알려 하지 않으며, 부질없는 사람이 만들어 낸 고안(考案)에만 의지하려 하는가.

‘평화를 위해선 전쟁을 해야 한다’는 욕심쟁이들이 만들어낸 해괴망측하고 모순된 논리를 언제까지 믿고 쫓으려 하는가.

어리석은 위정자들이여, 미련하고 욕심 많은 평화론자들이여, 평화는 하늘의 뜻을 받은 사람에 의해서만이 이룰 수 있다는 진리를 믿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예부터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상)’의 정신을 이어왔고, 따라서 ‘인명경시(人命輕視,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본다는 의미)’풍조를 경멸해왔던 천손민족이며 동방예의지국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세태가 어떠한가. 보고도 못 느낀다면 살았다 하나 죽은 자가 아니겠는가. 자고 나면 보기 싫어도 보고 들어야 하는 뉴스는 타인도 아닌 자기 부모와 자식과 혈육을 거침없이 죽였다는 뉴스다.

이 같은 현실은 국가와 민족 간에 전쟁을 넘어 각 개인의 인성(人性) 곧 사랑과 평화가 파괴된 말세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며, 나아가 인생에게 더 이상의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정적 대목이라 하겠다.

이제 기다리고 기다렸던 하늘의 뜻과 목적이 천택지인을 통해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절체절명의 그 순간(時)을 맞이했다는 점을 깨달아야만 한다.

ⓒ천지일보 20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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