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not caption

러일 전쟁이 한창인 1904년 7월 15일, 안종덕의 상소는 계속된다.

“요즘의 관보를 보니, 칙임관·주임관·판임관의 벼슬이 매번 가까이 돌면서 사적인 총애를 받거나 점쟁이나 이단(異端)의 무리들에게 내려지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두 무리들에도 어찌 등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기야 하겠습니까마는, 대체로 이 무리들은 간사한 술법을 숭상하고 간교하여, 안으로는 남을 헐뜯고 시비를 전도하며 밖으로는 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권세를 구합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없는 무리들을 앞다투어 추종하며 저마다 아부하여 편당을 만들고는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쫓아냅니다. 이런 형세는 필시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니, 어찌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종은 여전히 점쟁이나 이단의 무리를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1899년에 만난 성강호이다. 그는 고종에게 1895년 을미사변에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혼령을 볼 수 있다고 현혹했다. 이에 빠진 고종은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매번 성강호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1년 사이에 벼슬이 뛰어올라 협판(차관급)에 이르렀으며 그의 집 문 앞은 항상 저잣거리처럼 붐볐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온다.

상소는 이어진다.

“지금 중앙과 지방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대부분 지조가 없고 턱없이 벼슬을 차지한 자들입니다. 약간이나마 염치가 있고 조금이나마 절개를 지닌 사람들은 임용되자마자 바로 쫓겨나고 벼슬에 나서자마자 물러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폐하의 공정한 마음을 헤아려서 왔다가 나중에는 이 무리들의 배척을 받고 떠나버립니다.”

간사한 자는 벼슬을 다 차지하고, 염치 있고 절개 있는 자는 쫓겨나는 현실이 대한제국이었다. 이어서 안종덕은 고종의 늦잠 버릇에 대해 말한다.

“대궐 안의 일은 알아서 안 될 일이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가만히 듣건대 폐하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어 정오가 지나서야 일어나므로 아침 식사를 들자마자 벌써 날이 저물어버린다고 합니다.

대문이 열리면 행랑(行廊)이 마치 시장 같아지고 항간의 잡된 무리와 시골의 부정한 무리들이 밀치며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서는 폐하 앞에서 버릇없이 부산스레 들락날락하니, 이는 무엇을 도모하자는 일이겠습니까?

폐하를 보좌하여 일을 주관해야 할 높은 관리들과 나랏일을 논의해야 할 신하들은 해가 지나도록 폐하를 만나 뵙지 못하고 그저 문서나 받아 처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판이니 온 나라에 시행되는 정사가 과연 공정한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것이겠습니까?

이는 명철한 임금이 정사를 베푸는 원칙에 손상을 주는 것 일뿐 아니라, 옥체를 조섭하는 도리에도 해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고종은 1870년대부터 민왕후와 함께 밤새 연회를 즐겨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 버릇은 여전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공적인 도리를 널리 시행하여 사적인 총애를 받는 자들을 내쫓고 신망 있는 사람을 널리 등용하소서. 대책을 세울 때에는 조정에 묻고 개인들과 의논하지 말며, 인재를 선발하는 경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고 충직한 선비들 속에서 구할 것이요, 연줄을 대어 결탁하는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들 속에서 찾지 말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안종덕은 간사하고 부정한 무리를 멀리하고 신망받는 사람을 가까이하라고 간언한다. 하지만 고종은 여전히 몇몇 편애하는 사람들에 의존해 대한제국을 이끌고 있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