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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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을 구성하는 요소는 네 가지이다. 시간(Time), 공간(Location), 심리상태(Mind), 상황에 대한 판단(Situation)이다. 작고한 가수 김광석은 ‘기다려줘’라는 애절한 노래에서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호소했다. 참으로 이기적인 부탁이지만 김광석의 애절한 목소리로 들으니 기다려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는 기다림에 대한 시간적 조건이다. 역경의 수괘(需卦 ☵☰)수괘에서는 교외, 모래사장, 뻘, 구멍이라는 기다리는 장소가 나온다. 또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술과 음식을 먹으며 느긋하게 기다린다는 심리상태가 포함돼 있으며 각각의 경우 길흉의 판단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둔괘(屯卦☵☱)와 몽괘(蒙卦☶☵)에도 기본적으로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력과 경험을 갖추지 못한 단계에서 서둘러 추진하다가는 실패할 것이 뻔하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기다림은 성질이 다르다. 둔괘는 천지창조 이후에 활동의 첫 단계이므로 혼돈의 내부에 잠복돼 있는 상태이다. 강보에 누운 신생아다. 몽괘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으나 어리고 유약해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는 단계이다. 걸음마를 시작하고 겨우 말을 익힌 정도의 유치원생이다. 수괘는 사회진출을 앞둔 청년이다. 그러나 한 번 더 자신의 실력과 현실을 가늠하며 진출의 시기를 결정해야 한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반드시 노력과 합리적인 판단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는 사람 99명이 재수 좋은 놈 하나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을 비웃었지만, 회갑을 넘기면서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사는 운세가 닿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것과 같다. ‘만사분기정(萬事分己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이다. 세상만사는 이미 분수가 정해졌는데도, 부질없는 인생은 공연히 분주하기만 하다, 이 시를 숙명과 체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분수를 아는 것은 체념이 아니라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지혜이다. 무능력자가 목표만 크게 세웠다고 되겠는가? 실력이 모자라면 기다려야 한다.

제갈량은 남양에 살 때 문설주에는 ‘담박이명지(淡泊以明志),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이라는 대련을 걸어놓고 천하의 형세를 담담하게 관찰하면서 지냈다. 신라시대 최고의 지성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이름은 이 대련에서 따왔다. 제갈량처럼 세상을 담백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최치원은 현실에 참여하지 못했다. 시대와 환경이 달랐던 것이다. 제갈량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시에 담았다.

초당춘수족(草堂春睡足), 창외일지지(窓外日遲遲).

대몽수선각(大夢誰先覺), 평생아자지(平生我自知)

초당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창문 밖에는 아직도 햇살이 남아 있네.

큰 꿈은 누가 먼저 알겠는가? 내 평생의 꿈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을!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앞둔 영국의 웰링턴에게는 기다림의 극치가 느껴진다. 참모들과의 작전회의를 마친 웰링턴은 부관에게 공격개시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었다. 부관이 5분 남았다고 하자 그는 5분 후에 깨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야전용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았다. 그의 여유를 보고 부관은 승리를 직감했다고 한다. 성공이 눈앞에 있다는 확신이 들면 사람은 누구나 경거망동한다. 맹수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기다림이란 막연하게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상황을 분석하며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대선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잠룡들에게 느긋하게 기다리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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