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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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자락의 고을 산청에 가면 산청 3매가 있다. 3월이 오면 매화가 사방천지로 피어나는 섬진강 매화마을과는 달리 산청 3매는 조용히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운다. 구례 화엄사의 홍매나 양산 통도사의 자장매만큼 유명하지도 않아 찾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이곳에 이런 매화가 있나 싶을 만큼 아는 이조차 드물다. 하지만 산청 3매는 수백년의 세월을 마당 한 켠 그 자리에 서서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처럼 고매한 자태를 은은하게 나타내고 있다.

산청 3매는 고려말의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는 남사마을의 원정매, 남명조식 선생이 산천재에 심어 즐겼다는 남명매, 단속사지터에서 정당문학의 뿌리를 보여주는 정당매가 그것이다. 모두 수령이 500년 내외의 고매(古梅)들이다. 고매라함은 단순히 수령이 오래된 것을 넘어 가지가 구부러지고 푸른 이끼가 끼고 비늘 같은 껍질이 생겨 모진 세월의 풍파를 온몸에 아로새겨 놓은 매화나무를 일컫는다.

산청 3매 중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나무는 남사마을의 원정매(元正梅)이다. 남사예담촌의 하씨 고택 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원정매는 고려말 원정공 하즙(河楫)선생이 심은 것으로 그의 시호가 원정(元正)이었던 데서 비롯됐다. 원정은 의를 행해 백성을 기쁘게 함이 ‘원’이요, 정의로써 남을 복종케 함이 ‘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꽃이 붉은 홍매화로 산청 3매 중 가장 오래된 수령 680여년을 자랑하는 원정매는 2007년에 원목이 고사하고 지금은 후계목이 뿌리에서 자라 매년 꽃을 피우고 있다.

원정매 있는 남사마을에서 지리산 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남명선생의 고장 덕산마을이 나오고 거기 덕천강가 산천재(山天齋) 앞마당에 천왕봉을 바라보고 남명매가 피어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께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이곳 지리산 산천재 정원에 손수 심었다고 알려진 이 매화나무는 수령이 480년, 높이 8m의 수목으로 해마다 봄이면 청량한 매화향기를 마음껏 발산한다.

남명 선생은 퇴계 못지않은 매화 애호가라서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짓고 살면서 매화나무를 심고 천왕봉을 바라보며 말년을 보냈는데, 그가 심은 매화나무를 사람들은 ‘남명매’라고 불렀다. 산천재 뜰에 핀 남명매는 기품이 있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선비의 성품을 닮았다.

남명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천왕봉을 바라보며, 마음에는 경과 의를 새기고, 몸에는 경의검과 성성자 방울을 달고 다니며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했다. 선생의 기품을 이어받은 남명매는 아직 원가지가 힘이 있어 매년 3월이면 꽃이 만개해 산천재 마당 안을 은은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그래서 산천재 뜰 안에 들면 가까이 매화를 두고 멀리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던 선생의 고결한 덕성과 인품이 매화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 해가 저물어가니 홀로 지내기 외로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까지 내렸구나/ 선비 집은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했는데/ 매화가 피어나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歲晩見渠難獨立/ 雪侵殘夜到天命/ 儒家久是孤寒甚/ 更爾歸來更得淸).

남명매가 있는 덕산에서 지리산 대원사 가는 길 청계, 어천계곡 방향으로 가다 보면 불국사 석가탑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단아한 삼층석탑 2기가 있는 고즈넉한 절터가 하나 나온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됐다가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타 소실된 단속사(斷俗寺) 옛터이다. 이곳 단속사 터에 산청 3매의 마지막 매화인 ‘정당매(政堂梅)’가 있다. 하얀 꽃을 피우는 고매(古梅) ‘정당매’는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매화 중의 하나이다. 매년 3월이 되면 고결하고도 은은한 향기를 절터 가득 흩뿌리는 정당매는 수령 640년, 나무 높이 3.5m의 백매화이다.

정당매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었던 통정공 강회백 선생이 유년 시절 지리산 자락 신라 고찰 단속사에서 수학할 때 심은 나무인데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에 이르렀기에, 후세 사람들과 사찰의 스님들이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고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통정공 강회백(通亭公 姜淮佰)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자신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단속사에 심은 매화(斷俗寺 手種梅)라는 시를 읊었다.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한 그루 매화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偶然還訪石山來/ 滿院淸香一樹梅/ 物性也能至舊主/ 慇懃更向雪中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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