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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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가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넘어 이미 꺼림의 대상일뿐이다(天下皆知謂之美斯惡已). 모두가 옳다는 것은 옳은 것을 넘어 옳지 않은 것으로 변한다. 유와 무는 서로의 상대적 개념을 생성하고(有無相成), 어려움과 쉬움은 상대적으로 형성된다. 길고 짧음은 서로의 형상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높음과 낮음이 있어야 기울기를 안다. 음과 소리가 어울리면 화음이 되고 앞과 뒤는 차례를 만든다. 이것이 성인의 다스림이다. 오랫동안 창틀에 걸어놓았던 노자2장을 드디어 새벽에 내린다.

노자 제2장을 이해하는 코드는 3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음양의 상호보완성, 둘째는 주역의 변화론, 셋째는 오행의 순환론이다. 노자의 레토릭은 교묘하다. 아름다움(美)의 반대어는 추(醜)함이 돼야 하는데 좋아한다(好)의 반대인 싫어한다는 오(惡)자를 썼다. 이는 아름다움과 추함이 관찰자가 바라보는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상 그 자체에 이미 미추와 옳고 그름이 모두 내재됐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의 인식은 대상의 차이를 통해 어떤 정도를 판단하는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러한 인식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주역에서는 만물은 극에 이르면 변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연계의 보편적 법칙을 의미할 뿐이지 대상과 인간의 인식 사이에서는 극에 이르지 않아도 수시로 변화가 발생한다. 세부 현상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다양성을 나는 억지로 일반적이라고 부른다. 대상이 변하면 인식도 반드시 변하는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서 새벽이 열리고, 인식의 갈등이 완화되면서 드디어 노자 제2장이 오랫동안 걸려있던 고정관념의 창틀에서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노자 제2장을 절대가치의 부정으로 이해했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노자2장은 주관이 새로운 세계를 열고 그것이 다시 보편성을 확보하는 팽창성 선순환을 가리킨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과 같은 동일현상은 천지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근대에 미와 선의 가치관이 변화한 상징적 현상은 미술에서 두드러진다. 구스타프 크림트와 코코슈카의 그림을 보자.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유럽지성과 예술의 변화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가 주도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문이 쇠망의 길로 접어든 합스부르크제국에서 열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유럽의 중심은 파리와 런던으로 이동하고 세상은 변했다. 무엇이 변할 것인지를 예시한 사람들은 정치가도 성직자도 철학자도 과학자도 아니라 예술가 특히 미술가들이었다. 이들의 공통된 직관은 이제 과학적 논리가 주도한 절대진리와 가치가 무너진다는 확신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이비설신의라는 6근의 피상적 개별감각이 아니라 6근의 통합을 통한 내면세계 그 광활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insights 즉 통찰이다. 사실적 묘사는 사진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숭고함과 성스러움은 아방가르드로 대체된다. 미술가는 시각적 사물의 외형이 아니라 이제 내면의 세계를 보여줘야 한다. 생물학과 정신의학을 토대로 본능과 무의식의 존재가치를 인정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욕망을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발산과 충족의 대상으로 인정했을 때 클림트와 코코슈카는 뒤틀린 내면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클림트는 황금빛과 환타지로 코코슈카는 추악함으로! 미술은 이제 팜므파탈까지 포함한 추함으로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그렇다! 천하가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싫어하는 대상까지 포용할 때 가능하다. 공통된 코드는 인사이트였다. 가장 억압된 여성의 성욕이 남성과 대등해졌다. 일반성은 보편적 통찰과 융합될 때 상식이 된다. 상식의 지배는 일시적 평안이다. 그렇다면 도덕경 제2장은 통찰을 통한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지 상대성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상대성은 여전히 미완의 합의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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