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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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242~284)는 손권의 손자로 동오의 마지막 황제였다. 손호를 사랑한 손권은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로 어렸을 때 팽조(彭祖)라고 불렀다. 즉위 초에는 정치를 잘 했으나, 나중에 주색에 빠지면서 포악해졌다. 오죽하면 진무제 사마염까지도 그의 포악함에 진저리쳤다고 한다. 천기(天紀)4년(280), 동오가 서진에게 망했다. 손호는 항복한 후 귀명후(歸命侯)로 봉해졌다가, 태강5년(284) 낙양에서 사망했다.

역사는 망국의 군주였던 그를 혹평했지만, 망하기 전에 장인 하식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적어도 판단능력까지 마비되지는 않았다. “나는 덕이 모자라 백성들을 달랠 수 없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면 하늘의 법칙이 위반된다.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길조라고 생각하게 했다. 부끄럽다. 무창 이서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성이 견고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군대가 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죄이다.”

손호는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시와 글씨는 조조와 이름을 나란히 했다. 조조의 글씨는 웅혼하고, 손호의 글씨는 면밀했다고 하니, 글씨를 보면 사람을 안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폭군이었다는 손호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면권을 행사한 것은 역설적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왕망과 손호를 비교했다. 왕망은 거짓으로 인의를 행했고, 손호는 아무렇게나 은혜를 베풀어 둘 다 시작은 그럴 듯했지만, 끝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손호는 남이 자기를 똑바로 보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신하들은 그의 앞에서 감히 머리를 들지 못했다. 승상 육개(陸凱)가 간했다. “만약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 모두 어떻게 주군을 알아보겠습니까?” 손호는 육개만 머리를 들고 자기를 보라고 허락했다. 손호는 술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최소한 7되를 마시게 했다. 누군가 위요(韋曜)의 주량은 2되도 되지 않는다고 하자 그를 특별히 우대했다. 술지리가 열리면 위요에게만은 몰래 술 대신 차를 마시게 했다. 위요는 차를 마시고 취한 척 했다.

그러나 사관으로서 위요는 강직했다. 그가 한사코 황제로 추존된 손호의 부친 손화를 제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화가 난 손호가 위요를 죽였다. 낙양으로 잡혀온 손호에게 위의 중신 가충(賈充)이 비꼬았다. “각하는 남의 눈알을 파고, 얼굴가죽까지 벗겼다고 하는데, 이는 무슨 형벌인가?” 손호가 말했다. “신하가 되어 자기의 군주를 시해하면 간악하고 교활하고 불충인 사람이오, 그런 자에게 적용하는 형벌이라오.” 가충에 고귀향후 조모(曺髦)를 살해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가충은 부끄러워서 더 입을 열지 못했지만, 손호는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진무제와 왕제(王濟)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왕제가 손호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에 있을 때 얼굴가죽을 벗기고, 발을 잘랐다고 들었소. 무슨 죄 때문이오?” 손호가 대답했다. “군주에게 예를 잃은 신하는 그렇게 됩니다.” 황제의 면전에서 자세가 바르지 않은 왕제를 풍자한 말이다. 손호는 사마염을 놀리기도 했다. 잡혀온 손호가 사마염에게 절을 올렸다. 사마염이 말했다. “짐은 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렸다네.” 손호가 말했다. “제가 있었던 남방에도 폐하를 기다리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30년 후에 과연 서진이 망하고, 건업에서 동진에 건립됐다. 사마염이 손호에게 시 한 수를 지으라고 말했다.

손호가 술잔을 들면서 사마염에게 권한 시를 지었다. “옛날에는 저와 이웃이었는데(昔與汝爲隣), 지금은 당신의 신하입니다(今與汝爲臣). 위에서 당신이 한 잔 술을 드시면(上汝一杯酒), 만수무강하실 것입니다(令汝萬壽春).” 사마염은 공연히 시를 짓게 했다고 후회했다. 이러한 일화를 보면 손호는 망국의 군주였지만,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았다. 손견, 손책, 손권으로 이어지는 핏줄의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동진시대 강남 사람들은 오랫동안 손호가 죽지 않았다고 믿었다. 역사와 달리 사람들은 그를 크게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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