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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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서호의 서령교는 울창한 버들과 파란 호수를 동여맨 허리띠와 같다. 이곳에는 유명한 여류시인 소소소(蘇小小)의 자취가 남아있다. 소소소는 남제시대에 살았다. 당시 항주는 전당(錢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여자로 시와 노래로 유명했다. 그러나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자, 서령교 부근 이모집에서 자라다가 기생이 됐다. 그녀는 서호의 풍경을 사랑했다. 비단으로 가린 유벽향거라는 수레를 타고 다녔다. 중양절에 연하령(烟霞岺)에서 책을 읽고 있는 청년을 봤다. 차림새는 남루했지만, 자태가 비범했다. 포인(鮑仁)이라는 청년은 과거준비생이었으나, 여비가 없어서 응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털어놓았다. 소소소는 은자 100량을 흔쾌히 주었다.

당시 문인과 명사들은 다투어 그녀와 사귀려고 했다. 그녀는 관리의 부름은 일체 거절했다. 관찰사 맹랑(孟浪)이 전당에 와서 그녀를 불렀다. 소소소는 서계의 매화를 보러 간다고 피했다. 맹랑은 3일이나 연거푸 불렀다. 소소소는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다. 맹랑이 현령에게 부탁했다. 더 거절하지 못한 소소소는 맹랑을 찾아갔다. 맹랑은 언덕에 핀 매화를 가리키며 시 한 수를 지으라고 명했다. 소소소는 곧바로 붓을 움직였다.

매화수오골(梅花雖傲骨), 즘감적춘한(怎敢敵春寒)? 약환분홍백(若還分紅白), 환수청안간(還須靑眼看).

매화가 아무리 오만해도, 어찌 꽃샘추위와 다툴까? 만약에 홍백으로 나누어졌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보겠네.

맹랑은 시가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다고 칭찬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허약했던 소소소는 병에 걸려 죽게 됐다. 그녀가 이모에게 부탁했다.

“저는 서령에서 나서 서령에서 죽습니다. 그러니 죽어서도 서령에 묻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가 사랑하던 산과 물에 짐을 지지 않습니다.”

그녀가 죽은 지 3일 후에 활주(滑州)자사 포(鮑)상공이 보낸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소소소의 이모는 눈물을 흘리며 3일 전에 죽었다고 말했다. 포인은 곧바로 소복을 입고 달려와 그녀의 관을 붙잡고 통곡했다.

“소소소여! 당신은 진정으로 혜안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것은 당신이라는 지기 덕분이오. 이제 지기가 없으니 누구에게 공명을 자랑하겠습니까?”

포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서령교 옆에 좋은 땅을 골라 그녀를 묻은 후 스스로 전당소소소지묘(錢塘蘇小小之墓)라는 묘비명을 썼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묘 위에 모재정(慕才亭)을 세웠다. 가난한 인재를 알아본 그녀의 안목을 기념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누군가 기둥에 대련을 남겼다.

천재방명류고적(千載芳名留古迹), 육조운사저서령(六朝韻事著西岺).

오랜 세월 이름 옛 자취로 남았고, 육조의 시는 서령에서 빼어났네.

수많은 역대 명사들이 소소소를 그리워하며 시와 그림을 남겼다. 당대의 백거이(白居易)도 양류지(楊柳枝)라는 시를 지어 소소소를 그리워했다.

소주양류임군과(蘇州楊柳任君夸), 갱유전당승관와(更有錢塘勝館娃).

약해다정심소소(若解多情尋小小), 녹양심처시소가(綠楊深處是蘇家).

소주 수양버들을 그대에게 자랑하고파, 아름다운 전당에서 묵었다네.

넘치는 감정 풀려고 소소를 찾았더니, 우거진 버들 속이 소소소 집이었네.

봄이 찾아왔지만, 여전히 세상은 각박하다. 이런 달달한 드라마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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