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10여년 전의 그 악몽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국정원의 여론조작 사건은 그 충격만큼이나 국민적 분노도 거셌다. 한마디로 권력의 주구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끝은 나름 의미를 남겼다. 당시 원세훈 국정원장은 이미 구속됐으며, 동시에 국정원 개혁도 더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구속돼 있다. 국민적 심판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역사를 진보케 하는 힘을 실감하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도 이렇듯 조금씩 더 성숙해 가고 있다.

최근 또 하나의 큰 사건이 불거졌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이 국회의원과 언론인, 연예인 등에 대해 조직적으로 사찰을 했으며 관련 문건이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박지원 국정원장도 국회 정보위 현안보고에서 일부 사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정원의 60년 불법사찰 흑역사를 처리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현 상태에서는 ‘비밀’ 등의 장치로 꽁꽁 묶어 뒀으니 국회가 특별법을 만들어 그 봉인을 해제시켜 달라는 뜻이다.

이번 국정원의 불법사찰 실태는 국정원의 반성이나 개혁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집권세력이 작정하고 한 건을 터트린 것은 더욱 아니다. 정보공개를 요구한 불법사찰 피해자들이 대법원까지 가는 긴 싸움 끝에 얻어낸 투쟁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더 소중하다. 여기에 어떤 정치공세를 퍼붓는다든지 또는 4월 보궐선거 운운하며 음모론을 펴는 것은 금물이다. 국정원의 불법사찰을 옹호하는 ‘공범’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곽노현 전 교육감 등 피해자들의 요구에 대해 국정원은 63건의 사찰문건을 공개했다. 그중에는 ‘종북좌파 연계 불순활동 혐의자 목록’이라는 문건도 나왔다. 과거 이승만 정권이나 유신정권에서 볼 수 있었던 ‘빨갱이 사냥’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 등을 동원한 반인권적 범죄행각이 불과 10여 년 전에도 정권 차원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경악스럽다. 그리고 당시 사찰에 나섰던 그 범인들이 지금도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활동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끔찍하다.

국정원 내부에서 나왔다는 증언을 보면 상황이 더 심각하다. 국정원 불법사찰 기록물에는 당시 18대 국회의원 전원을 비롯해 법조인과 언론인 심지어 시민단체 주요 인사들과 연예인들까지 무려 1000여명의 신상정보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관련 문건에는 국정원에 지시한 당사자가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적시돼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청와대 지시로 각 정보기구들을 동원해 정보와 첩보 들을 모았으며 그 자료가 지금 국정원에 보관돼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 다수의 내용은 불법사찰을 통해 획득한 자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무엇을 지시했으며, 또 각종 불법사찰 자료를 보고받은 당사자들이 누구인지는 이제 밝혀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사태의 심각성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홍보기획관과 정무수석을 역임했던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예비후보의 이름도 거론되고 있다. 비록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큰 악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규명을 늦출 순 없다. 더욱이 선거에 불리하다고 해서 구태의연한 정치공세나 근거 없는 음모론으로 몰아가서도 안 된다. 국정원이 밝힌 일부 문건은 수많은 피해자들의 기나긴 법정투쟁으로 얻어낸 명백한 증거인만큼 이젠 그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데 앞장서는 것이 옳다. 그것이 부산시장 선거를 준비하는 후보자 입장에서 시민들을 대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도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이명박 정부만이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서도 불법사찰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비밀로 봉인된 사찰 문건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기에 박 원장이 앞장서 문건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요구한 것이다. 이제 결론은 명확하다. 불법사찰이라는 반헌법적, 반인권적 행태를 반성하고 과거의 잘못된 역사와 단절하기 위해서라도 사찰 문건을 모두 공개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더 늦어지면 4월 보선정국이다. 또 그 이후는 대선정국이 본격화 될 것이다. 어물쩍 하다가는 타이밍을 놓치고, 또 해를 넘기면서 흐지부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피해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으로 찾아낸 불법사찰 문건, 민간인까지 포함된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이를 뭉개고 갈 수 있다면 이건 정말 나라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아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박지원의 국정원이 정보공개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정원도 그만큼 달라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참에 불법사찰의 전모를 밝혀서 과거의 어두웠던 권력형 범죄를 청산하자는 것이다. 곧 치러질 4월 보선의 유불리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특정인 누구를 구속시키자는 것은 더욱 아니다. 국정원과 권력기구의 개혁, 더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온 국민과 함께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개정된 국정원법에 따르면 국회 차원에서도 사찰정보 공개를 요구할 수 있다. 그 마저도 한계가 있다면 특별법을 통해서라도 불법사찰 문건에 접근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국정조사도 검토해야 한다. 180석 거대 여당을 만들어 준 국민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물론 국민의힘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이다. ‘정치공작’ 운운하는 구태는 이제 그만두길 바란다. 이명박 정부 때의 일이라고 해서 또 방해만 할지도 지켜볼 일이다. 국민을 ‘졸(卒)’로 보지 않는다면 국민의힘도 이번 기회에 달라지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다수가 국정원 불법사찰의 피해자임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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