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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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죄가 없는데 귀양을 가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이 많았다. 정절을 지키며 오로지 낭군만을 기다리던 고전 속의 춘향은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는다. 죄목은 관장(官長) 능멸죄. 남원부사 변학도가 수청거절에 대한 앙심으로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다. 권력자들이 힘없는 백성이라고 제멋대로 인신을 구속하고 체벌을 가했던 봉건의 악폐를 알려 준다. 비록 픽션이지만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민초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읽을 수 있다.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은 젊은 시절 원나라 사신 마중을 거부했다고 10년간 나주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을사사화 때 노수신(盧守愼)은 20여년이나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젊은 청춘을 귀양살이로 다 보낸 것이다.

올곧은 학자였던 노수신은 간신을 탄핵한 것이 죄가 돼 미움을 샀다. 순천(順天)을 시작으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진도(珍島)로 옮겼다. 노수신의 20년은 탐관오리들을 질책하다 귀양을 간 실학자 다산 정약용보다 2년이나 긴 기록적인 세월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전장에서 임금의 명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서울로 압송돼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았다. 어명을 따르면 백성과 군사들이 몰살당하고, 어기면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장군의 눈에는 임금 보다는 전쟁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들과 군사들만 보였던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의를 선택했던 충정을 알 수 있다.

강진에서 18년간이나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한 다산 정약용. 감옥살이의 고통을 ‘옥중오고(獄中五苦)’라고 표현했다. ‘형틀의 고통, 토색질 당하는 고통, 질병의 고통, 춥고 배고픈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을 말한다.

다산은 얼마나 뼈에 사무쳤는지 ‘인신을 구속하거나 처벌할 때 신중을 기할 것’을 강조한 명저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했다.

‘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이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율문(律文)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과연 법을 잘 알고 있는지,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는지, 억울한 국민들은 없는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답은 ‘노’다. 대한민국은 인권국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아직도 봉건의 악습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1990년 부산 낙동강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던 최모 장모씨는 21년간 억울한 옥살이 끝에 출소한 후 무죄로 판명됐다.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해 허위 자백한 것이 입증된 것이다.

필자의 지인 하나는 십여년 전 제주도에서 사업을 하다 뇌물죄로 구속돼 6개월을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결국은 무죄로 석방됐다. 나중에 들리는 소리에는 괘씸죄가 적용돼 인신 구속됐으며 억울함이 풀렸다는 것이다. 6개월 감옥에 갇힌 사업상의 피해는 물론, 본인과 가족들의 참담했던 마음을 어루만져 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교인 명단을 고의로 빠뜨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역학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신천지예수교 대구교회 관계자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지금까지 추운 겨울 옥살이를 한 이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피해는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여론몰이에 편승해 죄 없는 국민들을 마구 구속하는 봉건의 악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인권존중이나 공정한 법의 실현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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