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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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심청가 가운데 ‘타루비(墮淚碑)’란 대목이 있다. 타루비란 눈물을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인정 많은 도화동 승상부인이 동네 입구에 죽은 심청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심청의 부친이 딸 생각이 나면 타루비를 찾아 통곡하며 부락귀신에게 데려가 달라고 절규하는 소리는 심청가중 백미다. 타루비 앞에 쓰러져 발버둥 치며 자학하는 심봉사의 모습에 관중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유교사회에서는 부모를 두고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악상(惡喪) 혹은 참척(慘慽)이라고 했고 부모의 슬픔을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고 표현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서하(西河)에 있을 때 하나뿐인 아들이 죽자 너무 슬픈 나머지 눈이 멀었다. 포통서하(抱痛西河)라는 말은 이 고사에서 비롯됐는데 죽은 자식을 안고 통곡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내가 쓰는 아빠 엄마의 이야기’란 책에서는 임종 순간까지 40년 전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 아버지란 내용이 가슴 뭉클하다.

“딸이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기차를 타고 남원 쪽을 지나가는데 아버지가 야산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차가 방향을 틀어도 계속 그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버지, 저기가 어디예요? 누가 살았어요?’ 하자 어머니가 ‘너희 큰 오빠가 묻힌 곳이다. 이곳만 지나가면 눈을 못 떼네…’하며 혀를 차셨다. 그때가 아버지 나이 60이 넘으셨으니 무려 40년 전에 떠난 자식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한 것이다.”

‘야곱의 꿈(Jacob’s Dream)’이란 팝송은 1856년 봄 미국 동부 앨러게니 산맥에서 실종돼 시신으로 발견된 형제를 그리워하는 슬픈 노래다. 당시 일곱 살과 다섯 살이던 두 형제는 실종 며칠 후 인근 숲속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노래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가는 아이들의 절규를 담고 있다. ‘엄마 아빠는 왜 우리 소리를 듣지 못하지….’ 이 슬픈 팝 뮤직은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전해 준다.

요즈음 한국사회에서는 너무 쉽게 자식들을 위해하고 또는 버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슬픈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40대 한 어머니가 8세까지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어린 딸을 살해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별거 중인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아버지는 택배 일을 하면서 꼬박 양육비를 보냈다고 한다. 유서에 따르면 사랑하는 딸을 보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더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생활고로 가족이 헤어지고 엄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딸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죽음 직전에 딸은 ‘엄마 사랑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엄마다. 아이는 엄마의 젖을 물고 그 사랑 속에서 자란다. 아빠보다도 엄마에게 먼저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자식을 죽이는 끔찍한 세상이 됐다.

천진난만한 이런 딸의 목숨을 끊은 비정한 엄마는 한동안 시신을 감추고 부패하도록 방치했다. 자신도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고는 하나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꼬리를 물고 있어도 국가가 대책을 내놓지 못해 더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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