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수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타석에서는 시원한 홈런으로, 수비에서는 든든하게 홈 베이스를 지키는 공격형 포수. 지금은 투수 리드나 수비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공격형 포수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지만, 80~90년대만 해도 야구의 꽃이라 불리던 포지션이 포수였다.

포수는 홈을 파고드는 주자와 몸싸움을 감당하면서 기싸움에서 주눅 들게 하거나 압도해야 했기에 대체로 육중한 체격의 선수가 주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이 같은 선수가 홈을 지키고 있으면 주자는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면 쉽사리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체격에서 품어 나오는 파워풀한 타격은 함께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격형 포수가 각광받던 시대였다.

메이저리그에선 마이크 피아자가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맹위를 떨쳤다. 한국프로야구에서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이만수를 꼽을 것이다.

이만수는 80년대를 대표하는 홈런왕이었다. 삼성에 입단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개막 경기에서 프로야구 1호 안타와 1호 홈런을 기록하는 영예를 안은 이만수는 첫 시즌에서는 김봉연에게 홈런왕 타이틀을 내줬으나, 이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홈런왕 3연패를 차지해 큰 인기를 누렸다.

1983년에는 0.294타율 27홈런 74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1위에 올라 시즌 MVP까지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김봉연(22개)이 교통사고로 한 달간 결장하는 덕분에 이만수가 수상의 주인공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다음 시즌에서 이만수는 타율까지 독점하며 0.340 23홈런 80타점으로 프로야구 최초 트리플 크라운의 대업을 이룬다. 하지만 이만수는 선발 27승을 거둔 최동원에게 시즌 MVP는 양보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22년이 지난 2006년에도 이대호가 이만수 이후 두 번째로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도 류현진에 밀려 MVP에 오르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1985년에도 이만수는 22홈런과 87타점으로 3시즌 연속 홈런과 타점 부문을 휩쓸었으나, 그해에도 MVP는 해태 김성한에게 내주면서 첫 수상 이후 MVP와 쉽게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86년은 김봉연과 ‘통산 100홈런 먼저 달성하기 대결’로 불꽃을 튀긴 가운데 김봉연이 99홈런을 일찌감치 때리고 주춤하는 사이 5개차로 뒤지고 있던 이만수가 마지막 뒷심을 발휘해 먼저 100홈런 주인공이 됐다.

이후 이만수는 김성래, 김성한, 장종훈에게 밀려 홈런왕과 더 이상 인연을 맺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려내면서 1991년 또다시 200홈런을 달성하게 된다. 김봉연이 늦은 나이 프로야구에 데뷔한 탓에 일찌감치 은퇴하면서 통산 홈런 레이스에선 이만수의 독무대였던 것이다.

이만수는 원년시즌부터 1992년까지 11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여전히 삼성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후 1993년 5개 홈런, 1994년 가장 적은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인 12개를 치면서 점점 쇠퇴하더니 1995년 5홈런, 1996년 6홈런, 1997년 2홈런을 끝으로 당시로선 최다였던 통산 252홈런을 세우고 은퇴했다.

이만수의 최다홈런 기록은 장종훈이 1999년 돌파하면서 그리 오래 가진 못했지만, 포수로서 든든히 안방을 지키면서 폭발적인 타격을 과시했던 ‘헐크’ 이만수의 향수는 지금도 많은 팬들이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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