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와당연구가

인도 신화에서 연꽃은 창조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는다’라는 비유는 불교의 초기 경전인 ‘수타니파타’에 나오는 문구다. 3세기 말 축법호(竺法護)가 한역한 여래흥현경(如來興顯經)에는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는 열 가지 인연을 서술하고 있는데, 부처는 연화의 탄생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나 보살은 대개 연화좌 위에 안치해 있다. 연화좌의 ‘화’자를 ‘빛날 華(화)’자로 기록하는 것은 부처를 광명의 상징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둠을 밝히는 석등이나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파도 대좌를 연화좌로 삼고 그 위에 안치하는 경우가 많다. 연화의 모양이 단판인가 복판인가, 조각의 섬세 유무를 가지고 시대를 가늠하기도 한다. 삼국시대 연화좌는 문양이 굵고 큰 대신 통일신라 연화좌는 화려한 게 특색이다.

고구려 이형 연화문 와당 (제공:이재준 와당연구가)ⓒ천지일보 2020.11.17
고구려 이형 연화문 와당 (제공:이재준 와당연구가)ⓒ천지일보 2020.11.17

고구려 연화문 와당은 종류가 다양하다. 연판의 모양도 각기 다르며 대개 4~6판으로 되어있다. 이는 대부분 8판으로 되어있는 백제 와당보다 연판 수가 작다. 백제 연화문 와당의 연판에는 장식이 없는 대신, 고구려 와당에서는 작은 연판에도 장식을 가미했다.

이를 감안하면 여기 소개하는 연화문 와당은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소작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연판은 장군총에서 출토된 가장 크고 화려한 연화문을 닮고 있다. 뾰족하고 후육한 연판 상면에 3개의 음각선을 나타냈다.

원형의 연주문대와 1조의 선문을 두른 중앙에 구형(球形)의 자방을 만들었다. 연주는 모두 17과(顆)나 된다. 내구는 끝이 뾰족한 간판으로 4등분했으며 그 사이에 4엽의 연판을 배치했다. 그리고 외구에는 1조의 선문으로 원문을 만들어 장식성을 가미하고 있다.

이런 형식의 와당은 고려 초기 와당에도 나타나 고구려 문화 복원이 염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 영토였던 충북 괴산 각연사 옛 건물지에서 이와 비슷한 형태의 고려와당이 수습된 적이 있다.

색깔은 적색이고 모래가 적으며 뒷면에는 직포의 흔적이 있다. 경 14.8㎝, 주연폭 1.5㎝. 두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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