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우 부산환경교육센터 이사

‘대한민국 어게인’을 부르짖으며 가수 나훈아씨가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하고 한 곡조 뽑아내자 장안이 떠들썩하다.

집값, 전셋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하던 장사도 안 되고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고, 먹고 살기는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는 데다가 코로나마저 닥쳐 마스크 없이는 하루도 생활할 수 없는 어지러운 세상이 됐으니 이래저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이 왜 이래?’라고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코로나 사태의 경우는 빈부와 지역도 넘어서는 전 지구적 재앙이니 다음 세대가 더 걱정이다.

그런데 정말 세상이 왜 이럴까?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테스 형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 물음에 테스 형은 철학자답게 ‘너 자신을 알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싶다. 테스 형은 일찍이 사람들이 두 가지 사실을 모른다고 역설했다. 첫째는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모르고 또 모르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테스 형의 주장이다. 그래서 두 가지 모름에 대해 ‘너 자신을 알라’ 즉, ‘네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는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했다. 여기까진 다 아는 사실이고.

그렇다면 테스 형은 내(=인간)가 도대체 무엇을 모르고 또 모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 그것은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진리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고, 지혜로 불릴 수도 있고 법칙이나 원리, 로고스로 불릴 수도 있으며 우주의 질서나 대자연의 섭리, 전지전능한 신으로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테스 형은 무당과 비슷하게 직접 점도 치고 다이몬의 소리를 듣는다 했으니 우리 유한한 인간이 겸손해야 할 대상은 바로 대자연, 대우주의 생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뭘 잘 모르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엇을 아는지를 알며 동시에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아는 것’, 특히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태도를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신(=대자연) 앞에 겸손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테스 형은 왜 그렇게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고 다녔을까? 나훈아씨가 알고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테스형, 즉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도 지금 우리시대의 사람들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오라클(신탁)을 통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얻었던 테스 형이 그 타이틀을 얻은 이유는 스스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당대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을 우리 똑똑한 인간이 다 안다고 자만심에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가치는 인간을 중심에 둔 유용성과 효용성을 기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물질만능주의와 실용주의적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세상의 중심, 모든 기준, 만물의 척도는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이 인식과 가치평가의 주체이며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한낱 인식의 대상이요, 가치 평가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는 다른 생명체들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그리고 생태계를 ‘인간을 위한 환경’으로 간주하는 현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통제할 수도 있다는 확신,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연이어 자연 생태계가 파괴되고 서식처가 파괴된 동식물들이 서식처 바깥으로 끌려 나오게 되고, 그들의 몸에 있던 바이러스도 함께 끌려 나오면서 새로운 숙주에게 옮아간다. 인간이 스스로 겁 없이 연 생태 판도라의 상자, 즉 인간의 무절제한 생태계 파괴가 결국 인간 스스로를 파멸시킬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이제 테스 형이 대답한 ‘나 자신을 알기 위해’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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