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해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고영주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27일 항소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고 전 이사장은 2013년 1월 한 보수단체 연설에서 당시 민주당 18대 대선후보였던 문 대통령을 가리켜 “부림사건 변호인 문재인은 공산주의자이고,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발언했다.

부림사건은 잘 알려진 대로 전두환 군사정권이 1981년 부산지역 교사와 학생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었던 대표적 공안사건이다. 2013년에는 ‘변호인’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1100만 관객을 모았을 만큼 국민의 관심도 뜨거웠다. 영화처럼 고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부림사건은 2014년 재심 끝에 무죄로 결론이 났으며, 당시 피해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명예훼손’에 대한 더 엄정한 잣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부림사건이 사실상 조작된 공안사건이라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는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대목이다. 시간이 지나서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최소한 도덕적 책임까지는 면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수사검사가 고영주 전 이사장이었다면 문제는 더 명확해진다. 반성하고 사과부터 할 일이었다.

그러나 고영주 전 이사장은 달랐다. 당시 변호인으로 참여했던 문재인 대통령을 가리켜 ‘공산주의자’라고 노골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한국정치에서 특히 이념 대결이 펼쳐지는 정치현장에서 ‘공산주의자’나 ‘빨갱이’를 거론하며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얼마나 저급한 정치공세인지 고 이사장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역사가 만들어 낸 저주와 경멸, 음모와 편향의 총체적 이미지가 그대로 투영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심은 명예훼손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사실 이보다 더 악의적이고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명예훼손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을 만큼 1심 재판부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고영주 전 이사장 본인이 이 사건의 담당 검사였다는 점에서 다분히 고의적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항소심 재판부가 명예훼손에 대한 엄정한 결론을 내린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항소심은 ‘공산주의자’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으며, ‘표현의 자유’ 안에서 이뤄진 적법한 내용이 아니라고 했다. 만시지탄이다. 최근 주변에도 상대를 향한 저급한 음모와 비방이 넘쳐나고 있다. 표현의 자유만 언급할 계제가 아니다. 비록 상고심이 남아 있지만, 이번 항소심 판결을 계기로 명예훼손에 대한 더 엄정한 기준이 확립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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