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곳간] 조선시대 장마철, 천문학자는 ‘전전긍긍’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8.11
[문화곳간] 조선시대 장마철, 천문학자는 ‘전전긍긍’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 2020.8.11

1821년 서울 2천여㎜ 내려

하늘 숭배, 천문관측 발달

천체 예측 실패 시 벌 받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연일 비 소식이 계속된다. 예상보다 길어진 장마로 산사태와 축대 붕괴 등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강하고 많은 양의 비는 ‘역대 최장’의 장마로 기록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급변하는 날씨 탓에 기상청의 강수량 예측 실패가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역사 속에는 어떻게 장마가 기록돼 있을까.

◆장마 옛 이름은 ‘오란비’

‘장마’는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비가 많이 내리는 것을 ‘임우(霖雨)’라고 했다. 1527년에 나온 한자교습서인 ‘훈몽자회’에 보면 ‘임(霖)’을 ‘오란비 림’으로 풀어냈다. 오란비는 ‘오래’란 뜻의 고유어 ‘오란’과 물의 고유어 ‘비’가 합쳐진 말이다.

순조실록 1821년 6월 자에 보면 올해 6~7월을 생각나게 할 만큼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6월 1일에는 수심이 여덟 푼인 비가 내렸고, 2일에는 수심이 일곱 치 다섯 푼의 비가 내렸다. 3일에는 수심이 두 치 세 푼이었다. 4일에는 수심이 한 치 한 푼, 5일에는 수심이 세 치 아홉 푼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한 치는 20㎜이고, 한 푼은 2㎜에 해당한다. 이 기록만 보면 닷 새 동안 무려 300여㎜의 비가 내린 셈이다. 6월 1일에 시작된 비는 8월 8일까지 계속 내렸다. 그해 서울에 내린 비의 양이 무려 2566㎜에 달했다.

기상청 국가기후데이터센터 연구팀에 따르면, 1778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의 일별 강수량 자료를 분석한 결과 1821년에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두 번째로 많은 비가 내린 해는 1879년으로 연 강수량이 2462㎜였다.

장마전선과 태풍으로 홍수 피해도 자주 발생했다. ‘삼국사기’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홍수를 ‘대수(大水)’ ‘대우(大雨)’라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총 176회에 달하는 홍수가 발생했고 이 중 70%는 7, 8월에 집중됐다.

◆천문관측 기관의 발달

하늘을 섬긴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천문 관측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이는 하늘의 이치를 깨달아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첨성대를 만들어 별을 관측하고 농민들의 풍년을 기원했다. 백제는 ‘일관부’라는 기관을 둬서 천문학자들이 별을 연구하도록 했다. 고려 때에는 ‘서운관’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관리를 등용한 후 천문학을 교육시켰다. 조선시대에도 서운관이 운영되다가 1466년 세조 때 ‘관상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상(觀象)은 ‘천체가 변하는 여러 현상을 관측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늘을 숭배한 우리 선조들에게 하늘을 관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에 따른 책임도 막중했다. 만약 관리들이 천체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임금에게 크게 혼쭐이 났다.

세종실록(1431년 6월 3일자)에 보면 “서운관이 날이 흐리고 구름이 이는 것만 보고, 유성(流星)의 변하는 것은 살피지 아니하오니, 청하건대 장 60대를 치옵소서”라고 기록됐다. 또 일식을 맞춘 자에게는 작은 말 한 필을 상으로 주고 월식을 맞추면 비단옷감을 받았다. 기상을 바로 맞추지 못한 관리는 근무평점에서 점수가 깎였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는 처녀, 총각이 제때 시집, 장가가지 못한 것을 장마의 원인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성종실록(1478년 6월 13일자)에 보면 “요즘 장마가 몇 달을 개이지 아니하니, 아마도 처녀가 집이 가난하여 제때 출가하지 못해서 원광(怨曠:시집·장가를 제때 못 감)의 한(恨)이 혹 화기(和氣)를 범한 듯하다. 혼숫감을 넉넉히 주어서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라”고 기록돼 있다. 과학이 더욱 발달한 오늘날로 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만큼 하늘을 숭배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더욱 잘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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