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이다. 본디 이 한자성어는 맹자의 ‘이루편(離婁編)’ 상(上)에 나오는 즉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돼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많이 인용돼 온 말로,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이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의미인 ‘아전인수(我田引水)’와는 대립된 의미로 자주 사용돼왔다. 이 역지사지란 말은 현 정국에서는 국회 인사청문을 앞두고 있는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다.

박 후보자는 국민의 정부에서 문화관광부장관을 역임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장관은 인사청문회법상 청문 대상이 아니어서 그냥 지나갔고, 그 이후 박 후보자가 국회의원 시절에는 국무총리, 장관 등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있을 때 청문위원으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그가 검증해 낙마시킨 고위 공직자들이 무려 9명에 달한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7월 천성관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해 후보자 부인의 면세점 쇼핑 의혹을 제기해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 2010년에는 민주당 원내대표가 돼 인사청문회를 진두지휘하면서 그해 8월 열린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를 낙마시켰고, 2014년 박근혜 정부 시절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해 ‘친일 사관 논란’을 물고 늘어지는 박 후보자의 파상공세에 못 이겨 총리 후보자가 도중하차했다.

이 같이 박 후보자가 청문위원으로서 세운 공은 혁혁한바, 정작 그가 청문대상이 돼 27일 청문회가 예정돼 있지만 깜깜이 청문회가 우려되고 있다. 통합당이 요구된 자료 제출이 미진한 데다가 여야가 합의해 유일하게 증인으로 채택된 고액후원자마저 인사청문회 개최를 앞두고 돌연 불출석을 통지해왔다. 통합당에서는 박 후보자가 그간 북한 도발을 두고 북의 입장을 대변·옹호 발언을 해왔고 대북송금 사건으로 실형을 살았으며 학력위조 의혹 등 사례를 보았을 때 부적격자로 낙인찍고 있지만 증인이 없으니 집중 추궁전략이 난망하게 된 것이다.

청문회 준비과정에서 코너에 몰린 박 후보자는 SNS상에 ‘후보자 흠결 있지만 국가 위해 통과시켜주자’는 3년 전 글을 올리며, 역지사지 호소와 함께 아전인수격 작전을 펴고 있는 중이다. 이쯤 되면 공격형 ‘낙마 9관왕’의 방어형 자기 왕관 차지에 부족함 없는 전략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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