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1938년 3월 10일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에서 도산(島山)이 향년(享年) 61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한 이후 일제는 문상과 장례조차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사회장을 치르게 하지도 못하게 했고, 고향으로도 운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20인 이내에 한하여 장지까지 가기를 허락한다는 일경의 명령으로 극히 적막하게 장송하였으며, 망우리 묘역에 있는 유상규(劉相奎)의 묘소 바로 오른쪽 위에 안장하였다.

여기서 유상규를 간략히 소개하면 1897년 평북 강계 출신으로서 1916년 경신중학교(儆新中學校)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를 입학하였다.

또한 유상규는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상해로 망명하여 도산과 첫 인연을 맺은 이후 비서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도산의 신임이 대단히 두터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상규는 도산의 권유로 1925년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으며, 그 이후 외과의사로 활동하던 중에 1936년 향년(享年) 39세를 일기(一期)로 별세(別世)하였다.

이와 관련해 유상규의 묘소 근처에 도산의 묘소가 안장된 사연을 동광 1947년 5월호 ‘도산선생의 최후’에서 인용한다.

“미국에 전보 치십니다”고 말씀드렸다. 부인과 아드님 필립군에게 알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들은 체 만 체 대답이 없으시어 혹시나 하고 이부인(수양따님 이응준씨 부인)이 다시 말할 때 “당치도 않은 소리 한다. 병원에서 죽는 것도 과해 미국 있는 사람을 불러오면 무얼 하나”고 꾸짖으셨다.

“그래도” 하고 다시 한번 간할 때에 선생은 “쓸데없는 소리 다시는 말아” 하고 막아버리시고 나에게는 “내가 대보산을 사랑해, 묻힐 자리를 택하는 건 욕심이나 형편이 허락하거든 대보산으로 가져가고 그럴 수 없거든 망우리가 좋아. 망우리로 가게 되면 유상규군 곁에 묻도록 하오.” 하시었다.

그런데 도산의 묘소가 유상규 묘소의 오른쪽 위에 안장된 이후 35년이 지난 1973년 정부는 서울 강남에 새로 닦은 큰 길에 도산의 성명을 붙이고, 도산공원도 만들어 도산의 묘소를 망우리에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의 거목(巨木)으로 활동하였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생애를 20회 연재할 수 있었던 것을 보람 있게 생각하며, 앞으로 우리 사회에 도산의 생애가 널리 전파되기를 충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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