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20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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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박선아 기자] 소년병: 14~16살의 중학생들로 구성된 어린 군인들

70년 전 6월은 아주 슬프고도 잔인했던 달이었습니다. 어제의 형제가 적이 되기도 했고, 아침까지만 해도 인사하며 헤어졌던 가족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은 단순히 나라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 전쟁이었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군의 수로만 13만명이 넘게 사망하고 3만 2000여명이 실종 됐으며 45만여명의 부상자를 남겼습니다.

이 많은 전투 인원 중 사실 정식 군인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나간 인원들도 있습니다. 바로 연필 대신 총을 들었던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 20살도 되지 않았던 어리디 어린 이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학도병은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며 후방지역이나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인천에서 마산까지 걸어가 자원한 이들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 축현국민학교에서 모인 인천지역의 학도병(인천학도의용대)들은 걸어서 남쪽 마산으로 향했습니다. 2000여명의 이들이 걸은 그 거리만 500㎞. 함박눈을 맞으며 하루에 25㎞씩 전진했습니다. 1951년 1월 8일 부산에 도착한 인천학도의용대는 육군 제2훈련소로 찾아갔죠. 자원한 이들 중에는 14~16살의 나이 어린 중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입대 불허 판정을 받았으나 탈영병의 군번을 목에 걸고서라도 조국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그 속에는 이경종 인천 학생 6·25 참전관 초대 관장도 있었습니다. 그는 입대한지 3년이 지난 19살이 돼서야 자신의 군번을 받을 수 있었죠. 만약 그 전에 전쟁터에서 스러져갔다면 가족들은 그를 찾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학도병은 국군에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과 달리 당시 우리나라에는 문맹자가 많았기 때문에 훈련소에 입소하는 징집군인에게 군대 훈련보다 기본적인 문자 교육을 먼저 진행해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공부를 하다가 온 학도병들은 국군의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벌써 70년째입니다.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은 끝났으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아직 ‘휴전’ 상태라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평화’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아직 내전이 일어나고 있으며 각 국가 간에 무기는 여전히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겪은 세대나 겪지 않은 세대 모두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을 하면서 지난 시절 풀꽃처럼 떠나버린 호국영혼들을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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