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이창림 씨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60~70년대를 회상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스탠더드 팝 가수 이창림

3년간 쎄시봉 DJ·홍대 재학시절 밴드 ‘캄보’ 결성
음악 억압 싫어 日 유학길 올라… 음악 포기 못해
귀국 후 어머니 위한 사모곡 ‘치자꽃 향기’ 작곡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쌀쌀한 바람이 부는 지난달 16일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에 위치한 아담한 음악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주인장이 손수 만든 자기 작품이 곳곳에 자리를 잡아 오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이창림(66) 씨는 스탠더드 팝을 부르는 가수다. 그의 굵고 낮은 목소리는 60년대를 풍미했던 팝을 소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러한 그가 근래에 주목받는 이유는 1965년부터 횟수로 3년간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쎄시봉의 산 증인인 셈이다.

쎄시봉이 세간의 관심거리다. 50~60대 장년층에게는 향수, 젊은 세대에게는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쎄시봉 멤버로 이미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을 꼽고 있다. 하지만 쎄시봉을 거쳐 간 가수들은 이들 넷 외에도 많다.

이창림 씨는 “당시 쎄시봉 외에도 르네상스, 돌체 등 음악감상실 붐이 일어났다. 그 중 최신음악을 틀어준 곳은 거의 쎄시봉이 유일했다”며 “당시 쎄시봉 DJ실에는 3000~4000장의 LP판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고 회상했다.

쎄시봉의 첫 식구들은 주인 이 선생의 내외, 그의 아들 이선권 씨, DJ실 스태프 조용호 씨, 구자홍 씨, 신청곡과 함께 사연을 읽어주는 성우 피세영 씨와 故 이장순 씨가 함께했다. 피세영 씨는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故 피천득 교수의 자제다. 쎄시봉을 드나드는 스태프는 무보수로 일했다. 단순히 분위기와 음악이 좋아 쎄시봉에 매달렸다.

현재 ‘쎄시봉과 친구들’이라는 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이상벽 씨도 당시 이창림 씨를 통해 쎄시봉의 일원이 됐다.

“상벽이는 바로 밑에 후배였죠. 송창식은 대학 후배의 친구였습니다. 창식이는 기타 솜씨를 보고 쎄시봉 주인의 아들 이선권 씨에게 바로 소개했습니다. 이후 창식이도 쎄시봉에서 연주를 하게 됐죠.”

◆ 음악은 내 운명

이 씨가 처음부터 음악에 푹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미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홍익대 조각과에 들어간 것 역시 조각가로서 뜻을 펼치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가 음악세계에 발을 담근 연유는 무엇일까.

6.25전쟁이 끝난 직후 텔레비전에는 미군 방송이 주로 나왔다. 유명한 사회자 쟈니 칼슨이 진행하는 투나이트쇼(Tonight show)에는 미국의 유명한 가수들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 씨는 “노래하는 모습을 보니 ‘잘만 하면 나도 부를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들었다”면서 “‘모나리자(Mona Lisa)’ ‘투 영(To young)’ 등 당시 유행한 팝송을 따라 부르니 곧잘 하더라”라며 음악의 길로 빠져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홍익대에 들어가서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비틀즈를 보고 그 역시 ‘대학 캄보’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캄보 부원들을 모집하고 학생과장을 설득해 악기 일부를 지원받고 1년 가까이 연습에 연습을 더했다.

이후 제2회 전국대학생재즈페스티벌(재즈페스티벌)에 참가해 신선한 반응을 불러 모았다. 전국에서 대학생 음악 팬들이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주위를 에워쌌다. 이 씨는 “당시 시민회관 문이 떨어져 나갈 만큼 대학생 음악 인기가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재즈페스티벌의 결과도 아주 좋았다. 영예의 대상에 이창림 씨의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같은 대회에 나선 윤형주 씨는 입선에 올랐다. 이 씨는 스크랩된 기사를 손수 보여주며 “재즈페스티벌은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고 전했다.

그 뒤로 명동의 제일가는 나이트클럽 OB's 캐빈에서 13년간 사회와 노래를 맡고 동양방송 TV뮤지컬에서는 주연을 연속 두 차례 꿰찰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심해 원하는 곡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이 씨는 1981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게이오대학대학원에서 역사와 미술 고고학을 전공하고 15년간 일본에서 강의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연 쓰러지셔서 한국으로 다시 왔습니다. 순전히 간병하면서 5년이란 세월을 보냈죠. 어머니를 위한 ‘치자꽃 향기’를 자작곡해 음반에 취입했습니다.”
귀국 후 그는 다시 원하는 음악인의 삶을 택했다. 음악은 그에게 본능이었다.

▲ 가수 이창림 씨가 자작곡한 ‘치자꽃 향기’를 부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 색깔 있는 솔로가수

그는 스스로 솔로가수라고 확실히 말한다. 자신의 음색이 굵고 낮아 듀엣이나 트리플과는 어울리지 않는단다. 그래서 옛날 윤형주 씨와 송창식 씨가 찾아와 같이 활동하자며 제의했으나 그가 거절한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게 전혀 후회되지 않습니다. 인생의 굴곡이 몇 있었지만 받아들이면서 음악을 즐기는 거죠.”

60~70년대 대중음악의 산 증인은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창림의 싱어롱라운지’ 음악실을 만들어 노래를 가르쳐 주고 자신도 그곳에서 원 없이 부른다. 게다가 일본어 구사 실력도 상당해 원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도 가르쳐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대중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쎄시봉은 대중가요의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당시 젊은이들의 음악을 선도했죠. 아울러 쎄시봉이 현재 네 사람 외에도 많은 분들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