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북구 민주로에 위치한 국립5.18민주묘지에 설치된 대동세상군상.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며 질서와 치안유지를 바라는 5.18민주항쟁의 정신을 담았다. ⓒ천지일보 2020.5.1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시 북구 민주로에 위치한 국립5.18민주묘지에 설치된 대동세상군상.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며 질서와 치안유지를 바라는 5.18민주항쟁의 정신을 담았다. ⓒ천지일보 2020.5.14

[5.18민중항쟁 40주년]

희생자 대부분 선량한 광주 시민
계엄군 전남대학생 ‘구타’로 시작
윤상원 열사 도청서 마지막 항쟁

‘민주주의 염원’ 역사적 사건 장소
5.18민중항쟁, 한국 민주주의 횃불
헌혈·주먹밥 나눔·연대정신 돋보여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5.18민주화운동 그때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납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그날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살아있는 저도 그런데 아직 찾지 못한 시신도 많으니 희생자들의 눈물이 하늘에 사무칠 것 같습니다.”

1980년 5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은 가운데 지난 13일 5.18민주묘지를 찾은 한 시민의 말이다.

이곳에 잠든 영령들의 기막힌 사연은 굳이 5.18현장을 경험하지 않은 누구라도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다. 5.18희생자들은 대부분 선량한 광주시민이었다. 제1 묘역과 2 묘역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의 항쟁 기간에 희생당한 시민들이 사망 일자대로 안장돼 있다.

최초 희생자 묘의 주인은 1-1묘역 故김경철씨다. 그는 후천적인 청각장애인으로 5월 18일 시내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지만, 인지하지 못하다가 계엄군에 붙들려 구타를 당하고 19일 최초 사망자로 기록에 남았다. 또 5살 아이가 친구들과 놀다 총소리가 나서 집으로 달려가던 중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뒤를 돌아보다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 마을에 총소리가 나서 주민들을 대피시키다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희생당한 마을 이장, 할머니와 살던 고3 남학생이 항쟁에 참여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주검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5세 외손자와 할머니, 삼촌 둘, 일가족 4명이 광주에 왔다가 “이제 서울로 올라간다”라는 전화를 마지막으로 아직 행불자 묘역에 안장된 안타까운 사연도 있다.

독일 ‘퀵’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출처: 독일 ‘퀵’지) ⓒ천지일보 2020.5.14
독일 ‘퀵’지에 실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아이. 이 사진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를 절묘하게 대비함으로써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전해준 5.18의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이다. (출처: 독일 ‘퀵’지) ⓒ천지일보 2020.5.14

◆5.18민주화운동 발생 배경

1980년 5월 17일 자정, 계엄군의 전남대학생 구타로 시작됐다. 전남대학교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곳이다. 불법적인 비상계엄이 전국에 확대됨에 따라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밤을 새워 면학에 몰두하고 있던 학생들을 구타하며 불법으로 가두면서 항쟁의 불씨가 뿌려졌다. 이어 18일 오전 10시경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이 학교 출입을 막는 계엄군에게 항의를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광주역과 금남로에 진출해 항의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은 항쟁 기간 중 시내에서 끌고 온 시민들을 종합운동장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 집단 구타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고 주검은 학교 안에 암매장됐다가 그 후 발굴됐다. 당시 정문 앞에는 용봉천이 흐르고 그 위에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복개됐다. 학생과 시민들을 불법 감금했던 이학부 건물은 철거됐으며, 교문 또한 새롭게 모양이 바뀌었다. 전남도청은 5.18광주민중항쟁 본부가 있던 곳이다.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 수많은 시민군이 이곳에서 산화됐다. 항쟁 초기 이곳 도청은 군부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분노를 표출하는 표적이었다. 그것은 “가자, 도청으로”라는 짧은 구호 속에 잘 응축돼 있다.

항쟁과 헌혈 ‘피의 민주화’

현재 84명이 행불자로 올라가 있고 안장된 영령은 68명이다. 지난 2001년 행불자들의 DNA검사로 본인들의 이름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아 5.18기념재단 등에서 암매장 여부를 조사하고 있지만 발견되지 않은 이들도 있다.

5.18은 ‘피의 민주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피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당시 병원에는 헌혈한 피가 넘쳐나기도 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던 21일 박금희(고3) 학생은 기독병원으로 헌혈하러 갔다가 이후 1시간도 안 돼 총을 맞고 병원으로 들어와 숨을 거둬 의사 간호사가 오열하기도 했다. 박금희양은 당시 7월 중 취업해 사회로 나갈 준비도 돼 있었다.

특히 윤상원·박기순 열사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윤상원은 전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개인의 삶을 버리고 민중을 위한 삶을 살 것인가, 편안한 개인의 삶을 살 것인가 고민하다 6개월의 직장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노동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했지만 그는 “돈으로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없고, 나라의 제도가 바뀌어야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상원은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 27일 마지막 항쟁까지 도청에 남아서 죽음을 맞이했다. 박기순은 노동운동가로 활동했으며 5.18이 일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이 둘은 들불야학(광주지역 노동야학)에서 일한 인연으로 1982년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김종률 작곡가가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둘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대학생 오정묵이 최초로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도 민주항쟁이 있는 곳에서 불리고 있다. 해당 곡은 홍콩사태 때도 불렸다.

(왼쪽)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젊은 남녀가 금남로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오른쪽) 1980년 5월 19일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제공: 광주 5.18기념재단) ⓒ천지일보 2020.5.14
(왼쪽)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젊은 남녀가 금남로2가를 지나다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오른쪽) 1980년 5월 19일 오후 7시경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의 차량시위. 계엄군의 만행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운전기사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을 가져왔다. (제공: 광주 5.18기념재단) ⓒ천지일보 2020.5.14

오월 영령 영원성 담은 상징물

국립5.18민주묘지는 ▲민주광장 ▲참배광장 ▲역사광장으로 구성됐다. 민주의 문은 참배객이 오월 영령을 만나기 위해 처음 들어서는 문이다. 신성한 장소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담은 명당 수의 분수가 시원스럽게 솟구친다. 입구서부터 분향 단까지 길이는 300m로 국립묘지 중에서는 가장 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걸어보니 끝까지 부를 정도다.

추념문을 지나니 분향 단 앞에 추모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40m의 웅장한 석탑으로 조형물 난형환조(손으로 알을 품은 형상)는 5.18 희생자의 혼령이 새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소망을 담고 있다. 참배광장을 중심으로 12지상이 새겨진 10개의 촛대가 있다. 12지상 중 첫 쥐와 마지막 돼지가 없다. 이는 희생되신 오월 영령이 처음과 끝이 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묘지 뒤로는 나무로 해와 구름이 꾸며져 있다. 가운데 해는 5.18영령의 영원성을 염원한다.

이외에도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는 ‘대동세상’의 모습을 형상화한 ‘대동세상군상’ 고인이 된 5.18민주유공자의 영정을 모신 고인돌 형태의 ‘유영봉안소’가 있다. 또한 전통 한옥 건물의 휴게 공간, 지하에는 어린이체험학습관이 있다. 역사에서 불의와 폭압에 대한 민족 불굴의 저항정신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사건들을 시대 순으로 조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옛 성곽에서 주변을 감시하던 누각 모양의 건물인 ‘숭모루’도 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을 찾은 오월영령 참배객. ⓒ천지일보 2020.5.14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국립5.18민주묘지 추모탑을 찾은 오월영령 참배객. ⓒ천지일보 2020.5.14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

5.18민주광장은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이며 5.18광주민중항쟁 정신을 낳은 산실이다.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들이 분수대를 연단으로 해 각종 집회를 열어 항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18일 이전 3일 동안 학생과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대규모 ‘민족민주회대성회’를 열고 시국 선언문을 발표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했다. 집회에는 광주 시내 고등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 끊임없이 민주화 투쟁 결의를 다지는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도청 앞으로 불렸던 이 일대는 현재 5.18민주광장으로 명명되어 불리고 있다.

카톨릭 센터 앞에서는 최초의 학생 연좌시위가 있었으며 5월 19일부터 수많은 시민이 끊임없이 모여들어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5월 20일 저녁에는 택시를 중심으로 100여대 이상의 각종 차량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거리를 누볐으며 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전까지 30여만 광주시민이 매일 운집해 군사독재 저지와 민주화를 촉구했다. 5.18광주민중항쟁 이후에도 항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투쟁이 금남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또 가톨릭 센터에서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 집회가 계속 열렸다. 금남로에는 조직적인 항쟁의 시발이었던 카롤릭 센터, 광주YMCA 등 주요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가짜뉴스’에 교통·통신도 차단

1980년 5.18이 발발하기 전 17일, 재야인사 등 운동권 학생들 위주로 나라에서 체포해가는 사건이 있었다. 농과대학에 다녔던 이세종 학생이 5월 18일 학교에서 농성하다 옥상에서 떨어져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검 결과 상당한 구타로 인한 사망이었지만, 객관적인 자료에는 단순 추락사로 처리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처음 발발했을 당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불렸고 지금처럼 민주화의 의미로 인식되지 않았다. 더구나 교통·통신 자체가 차단된 상태여서 외부로 이런 사실이 알려질 수도 없었다. ‘북한 침투설’도 있었지만 40년이 흐른 지금 가짜뉴스로 밝혀졌다.

항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날은 22일이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가 있었던 날이다. 집단 발포 이후 갑자기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병원에 준비돼 있던 혈액이 다 소진됐다. 시신을 처리할 관도 부족했다. 시민들이 시민군의 차를 타고 화순, 담양, 장성 등 시외지역으로 시신을 수습할 관을 구하기 위해 나가게 된다. 그러나 광주를 중심으로 외곽지역에 포진된 계엄군에 의해 18명 중 15명의 시민군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2명은 야산으로 끌고 가 확인 사살을 했다. 나머지 한 여학생(춘태여상 홍금순 고3)은 간신히 살았지만, 집으로 가지 못하고 광산유치장에 수감됐다. 이는 계엄군의 만행이 외부로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홍금순 학생은 결국 항쟁이 끝난 후 나오게 된다.

민주·인권·평화 가치 실현한 역사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1980년 5.18민중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횃불이 됐다. 불법으로 집권하려는 신군부 세력을 거부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광주시민들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광주시민들은 특히 계엄군에 의해 고립된 상황에서 절도, 강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등 높은 나눔·연대 정신을 발휘해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5.18민주화운동이 민주·인권·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천했던 역사적 사건임을 알게 해준다. 1980년 이후 5.18진상규명과 신군부 퇴진을 위한 시민, 학생들의 민주주의 운동은 유신체제를 계승한 전두환 정권을 붕괴시키는 6.10항쟁으로 이어졌으며, 촛불혁명으로 되살아나 한국 정치사의 큰 전환을 이뤄내는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국민들의 계속된 5.18진상규명운동에 당시 신군부 세력은 1995년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을 규정한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전두환·노태우를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법적 처벌했다.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며 희생자들의 묘역은 국립묘지로 승격됐고 당시의 피해자들과 참여자들은 민주유공자로 예우받으며 명예 회복이 이뤄졌다.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부터 6.19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 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졌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1년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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