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 선생.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의병장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 선생 영정. 임진왜란 호남 충청 의병활동에 크게 기여한 해광 선생의 공덕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됐다. 숙종 34년(1708) 호남의 사림 삼백여명의 발의로 운암서원을 창건해 봉향하고, 정조12년(1788)에 해광 송제민의 학덕과 충절을 가상히 여겨 조봉대부사헌부지평(贈 朝奉大夫司憲府持平)을 내렸다. ⓒ천지일보 2020.5.5

의병사에 빼놓을 수 없는 숨은 거장

호남·충청 의병활동에 선구적 역할

주역·천문·지리·의술 밝았던 실학자
 

토정 이지함 선생 문하생으로 수학

사후 100년만에 충절·학덕 재평가

숙종 34년 광주 운암서원에 배향

[천지일보=이미애 기자] 우리 민족에겐 의병 DNA가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 동안 의료진들이 이를 또 한 번 증명했다. 코로나19가 잦아든 5월 첫 주말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운암서원을 찾았다. 운암서원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 선생을 배향하는 곳이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선생의 행적은 최근에서야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되면서 ‘의병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재평가되고 있다.

해광 송제민의 본관은 홍주(洪州, 現충남 홍성), 초명은 제민(濟民), 자(字, 다른 이름)는 사역(士役) 또는 이인(以仁), 호는 해광(海狂)이다. 훗날 ‘백성을 구제하라’는 제민(濟民)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제민(齊民)으로 이름을 고쳤다.  증조부는 현감 송기손(宋麒孫), 할아버지는 감찰 청심헌(淸心軒) 송구(宋駒)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송정황(宋庭篁)이다. 시조 송계(宋桂)는 고려말 문하시중(門下侍中, 현 국무총리)으로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한분이다.

태조 이성계 즉위 후 시행된 조선 첫 과거시험(식년시)에서 송개신이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태종(이방원)이 고려수절신의 후예를 추천하라는 교지를 수차 내린 이후 중시조 송평이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와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 등을 지냈다. 송평의 딸은 양녕대군(세종대왕 맏형)의 손자 이산부정과 혼인하고, 송평의 아들이자 해광의 증조부인 송기손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둘째형)의 손자 보성군 이합의 딸과 혼인한다. 

그러나 화려한 집안 내력과 달리 난세(亂世)에 태어난 해광의 개인사는 불운했다. 곧은 선비였던 아버지는 당대 실세였던 윤원형의 눈 밖에 나서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다. 대를 이어 의병활동에 나선 아들 중 맏아들 타(拕)는 정유재란 당시 왜적의 수군과 대접전 중 무안에서 포로가 되어 왜선의 배에 실려 한산도 앞 바다에 이르렀을 때, 포로들과 함께 왜적의 칼을 빼앗아 싸우다가 숨졌다. 둘째아들 장(檣)은 왜적에게 붙잡혀 일본에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후에도 모함을 받았던 해광은 사후 100년 만에야 충절과 행적을 인정받았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5월 초록에 쌓인 운암서원(雲巖書院)전경.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5월 초록에 쌓인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운암서원(雲巖書院)전경. 해광 송제민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천지일보 2020.5.5

◆총명함과 효심 남달랐던 비운의 천재

“참, 애석하다. 이 아이가 보통 사람과 달리 매우 현명하기는 하겠으나 운명은 너무 기구하겠구나.”

명종4년(1549년) 12월 26일 홍문관정자 송정황(宋庭篁)은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라’는 뜻으로 제민(濟民)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해광은 훗날 이름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름을 제민(齊民)이라 스스로 고쳤다.

운암서원 배향록에 따르면 해광은 어려서부터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총민함과 행동이 남달라 ‘얼굴은 어린이나 행실은 어른과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 송정황은 학문과 경세에 밝아 세상의 그릇됨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이로 인해 당시의 실세 윤원형의 눈 밖에 나서 객지에서 비명횡사했다. 해광의 나이 겨우 아홉 살이었다.

비보를 접한 해광은 말을 타고 가다 말이 지치자, 도보로 여러 날을 먹지 않고 금산 땅에 이르렀다. 이후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이를 드러내어 웃는 일이 없었고 부친의 묘 앞에서 흘린 피눈물로 인해 풀이 말라 자라지 않으니 모두들 천생의 효자라 했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 내부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영모재.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 내부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영모재. ⓒ천지일보 2020.5.5

◆주역 탐구, 신묘한 경지… 토정 이지함 문하생

해광은 양명학에 심취해 빈민구휼과 애민사상 고취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스무살 이전에 성현의 글을 터득하고 천문, 지리, 의술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천리(하늘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역경(易經=주역)을 깊이 탐구해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또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경세치용(經世致用, 세상을 다스리는 데 실익을 증진)을 위함이라고 여겼다. 사설의료 기관인 의국(醫局)을 개설해 환자를 돌보고 백성을 구휼하는데도 힘썼다.

그러나 가문사적 비애와 강직한 성품, 속박되기를 싫어하는 호방한 성격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기를 단념하고 나이 20세 청년기에 들어서자 명산대천(名山大川)과 어진 선비를 찾아 전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러던 중 한산에 숨어 살던 토정 이지함 선생을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됐다. 해광 송제민이 토정의 정맥이라고도 일컬어진다.

1578년 해광이 토정 이지함을 따라 호서(湖西)에 갔을 때 조중봉과 박춘무를 만나 서로 뜻이 통하자 세한계(歲寒契)를 맺어 국란에 대비할 구국의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실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두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585년 해광이 존경하던 유학자 율곡 이이, 정철 등이 탄핵을 당하자 해광은 조헌과 함께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그의 숙부도 탄핵에 연루되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상소를 포기했다. 주역을 깨쳐 하늘의 이치에 밝았던 그는 모리배(謀利輩)가 판치는 조정을 보며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것을 알았다.

1588년에 조헌이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하자, 해광은 세상과 등지고 산과 바다를 유람한다. 그러다가 아예 무안 땅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이 섬 저 섬 돌아다녔다. 이때 스스로 호를 해광(海狂)이라 지었다.

해광 송제민 공덕비. 운암서원 옆에 세워져 있다. ⓒ천지일보 2020.5.7

해광 송제민 묘표비. 운암서원 뒤편에 세워져 있다. 해광 선생의 묘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으며, 송시열 선생의 송자대전(宋子大全)에 실려있다. 송자대전이라 한 것은 공자‧주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칭해 송자라 한 데서 비롯됐다. 서명을 문집이 아닌 대전이라 한 것도 이례적이다. ⓒ천지일보 2020.5.7

◆호남·충청 의병모집과 의병활동 선도

해광의 나이 43세 되던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왕은 의주로 파천(播遷)하고 방비가 허술한 관군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뜻있는 선비와 지사들이 들고 일어났다. 소식을 접한 해광은 의병을 모으는 격문을 각 고을 수령과 유생들에게 보냈고 300여명이 모였다.

“의사(義士) 송제민·양산룡·양산숙·임환·이광주·서정후 등과 더불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 조선 중기 문신 장유의 계곡집(谿谷集) 中 -

해광은 양산숙, 양산룡과 같이 의병을 모집해 구국의 대열에 나섰다. 이때 마침 전 부사 김천일이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해 김천일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종사관이 됐다.

일행은 1592년 6월 3일 나주 금성관에서 수도 한성 탈환을 위한 출병식을 열고 북진했다. 이날 출병식은 엄숙히 진행됐다. 손톱과 머리카락을 뽑아 마중 나온 가족들에게 남기고 살아있는 말의 피를 나눠마셨다. 300명으로 시작된 호남의병은 북진(北進)하는 동안 그 병력이 5000명을 헤아리게 됐다.

김천일이 이끄는 전라우도 의병군은 강경에서 적을 쳐부수고 승승장구하며 북진해 경기도 수원의 독산성(禿山城)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김천일과 더불어 해광은 일진(一陣)의 수성장이 돼 큰 전과를 올려 수원일대를 되찾고 6월 23일 입성했다. 그러나 관군의 잇따른 패배로 김천일 의병군은 고립상태에 빠지게 됐다.

당시 수원성의 왜군 세력이 막강할 뿐 아니라 왜군이 청주 근처에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호서(충청)지방에 의병을 더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이때 모두가 “송해광(宋海狂)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해광은 충청도로 내려가 사대부와 연결해 의병을 모집해 20일간에 2000여명을 모았다. 호서의병을 모은 해광은 조헌을 좌의대장으로 삼아 황간 영동을 지키도록 하고. 박춘무를 우의대장으로 삼아 금강 이남의 왜적을 막도록 하는 등 의병활동을 지휘했다.

이에 고무된 해광은 다시 호남지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봉기를 촉구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이다. 이 격문은 수원성 북상이후 김천일 의병군의 역할과 활동상황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충청도 지역의 중봉 조헌 의병군의 봉기가 김천일과 종사관 송제민에 의해 실현됐음을 알려주는 임진왜란 의병사의 매우 중요한 사료다. 해광이 작성한 호남의병문은 전문이 임진잡록과 대동야승에 수록돼 사료적 가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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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 선생을 모신 사당 내부 전경.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1549~1602) 선생을 모신 운암서원 입구 홍살문과 영정을 모신 영모재 내부 전경. 해광 선생과 사위인 석주 권필, 맏아들 송타 선생이 봉향돼 있다. ⓒ천지일보 2020.5.5

◆모친상 당한 김덕령에 “나라 일이 먼저”

해광이 지방에 내려간 사이 의병장 고경명, 김천일 등의 전사 소식을 접한 의병들의 사기가 저하돼 흩어지자 해광은 격문을 다시 호남에 보내 의병을 재모집한다. 이즈음 1593년 8월 모친상을 당한 외종 동생 김덕령을 찾아가 ‘나라 일이 먼저고 집안일은 나중’이라고 설득해 의병장으로 추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해광은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필을 구해와 의병장 김덕령의 사기 진작에 힘쓰고 이후 김덕령 의병군에 합류했다.

1596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왜병을 크게 격파한 김덕령이 이몽학의 난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고 29세에 옥사하자 해광은 종일토록 통곡했다. 해광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가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모든 일과 그 득실을 논술한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지형에 밝은 해광이 남원성이 위기에 처한 것을 간파하고, 남원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양원을 찾아가 남원성을 지킬 방책을 건의했지만 그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남원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후 명나라 주선으로 왜적과 화친 논의가 일자 화친할 수 없는 명분과 국력을 신장해 극복해야 된다는 이유를 역사지식으로 예증하면서 설명한 ‘척왜만언소(斥倭 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상소문에는 조선의 부패상과 탐관오리에 대한 직언이 많아 중간의 대신에 의해 왕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로 인해 감사의 미움을 사게 돼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입구 돌비.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입구 표지석. ⓒ천지일보 2020.5.5

◆거북선 재건조에도 기여한 선박기술자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됐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결과를 통해 밝혀졌다.

함평문화원이 발표한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 논문에 따르면 해광 송제민은 곤재 정개청의 문하생으로 대학자이며, 무역선단의 대선주(船主)로 대굴포 서쪽 1km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당을 짓고 우거했다.

200여년간 왜구의 기습이 없어 건조되지 않던 거북선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 나덕신, 나덕명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 박만천, 나치용, 이설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海狂集),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과 채제공의 번암집(樊巖集) 등 다수의 문헌에 수록돼 있다.

고려말에 제작된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빠르게 재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광산탁씨, 홍주송씨 등에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됐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에 따르면 무역선단의 대선주였던 송제민은 스승인 정개청의 요청에 따라 상선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 이를 병선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난중일기에는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김천일 장군 휘하의 의병이 무려 400척의 전함을 동원해 강화도 양화진 전투를 벌였던 것은 막하 종사관인 송제민, 이광주 등이 선박 제작 기술자였기 때문이었다. 김천일 장군과 송제민, 이광주, 임환, 양산룡 등 가문과는 복합적인 혼인관계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해광 송제민의 선단과 군량미 그리고 의병모병 지원활동 등은 각 문중들의 글에서 확인된다.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운암서원 내부. ⓒ천지일보 2020.5.7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광주광역시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운암서원 내부. ⓒ천지일보 2020.5.7

◆사후 100년 만에 재평가된 충절

해광은 임종에 앞서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죄인과 다름없다’하여 장례를 간소하게 치를 것을 유언하고 북향 4배 뒤 1602년 2월 27일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해광의 공덕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됐다. 숙종 34년(1708) 호남의 사림 삼백여명의 발의로 운암서원을 창건해 봉향하고, 정조12년(1788)에 해광 송제민의 학덕과 충절을 가상히 여겨 조봉대부사헌부지평(贈 朝奉大夫司憲府持平)을 추증했다. 

송강 정철은 해광에 대해 “그 마음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고, 그 지조는 서리와 눈같이 냉엄했으며 그 가슴에 품고 있는 바는 증점(曾點, 공자의 제자)과 같았고 그 큰 절의는 노중연(魯仲連, 주나라 충신)과 같았다”고 기록했다.

우암 송시열은 그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에서 “호남에는 옛날부터 으뜸가고 위대하며 어질고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을 잘못 만나 포부를 가진 채 그것을 실현시켜보지 못하고 죽어 오래도록 뜻있는 선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로는 해광(海狂) 처사만한 사람은 없다”고 기록했다.

운암서원(雲巖書院)은 원래 해광 선생이 자란 광주시 북구 운암동 자락 황계리에 세워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됐다가 1994년 지금의 광주시 북구 무등로(화암동)에 재건됐다. 사당에는 해광 선생과 사위 석주 권필, 아들 타의 영정과 신위가 있다. 서원입구 홍살문을 지나 내부에는 운암서원유허비와 해광 선생지천이 새겨진 묘비가 있다. 운암서원은 내외삼문·장판각·묘정비·영모재 등이 있다.

해광의 사위 석주 권필(1569-1612)은 선조, 광해군 때 최고의 시인으로 충장공 김덕령의 취시가(醉時歌)를 지은 사람이다.

해광은 남다른 지략과 탁월한 문장력으로 많은 글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전란 중에 대부분이 소실됐다.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과 만언상소문(萬言上疏文) 등을 수록한 해광집(海狂集)을 정조(正祖) 7년(1783)에 해광의 5대손 익중(益中) 등이 편집·간행해 전해지고 있다.

운암서원 유허비. 운암서원은 해광 송제민 선생의 사우(祠宇, 선조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로써 숙종 34년에 현 광주 동운동 동배마을 앞산에 건립됐다. 고종 5년(1868년)에 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광주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이 유허비 철거가 불가피하게 되자 영모재 옆으로 옮겨 세웠다. ⓒ천지일보 2020.5.7
운암서원 유허비. 운암서원은 해광 송제민 선생의 사우(祠宇, 선조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로써 숙종 34년(1708)에 현 광주 동운동 동배마을 앞산에 건립됐다. 고종 5년(1868년)에 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광주시 도시계획으로 인해 이 유허비 철거가 불가피하게 되자 영모재 옆으로 옮겨 세웠다. ⓒ천지일보 2020.5.7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 내부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천지일보 2020.5.5
[천지일보 광주=이미애 기자] 운암서원(雲巖書院) 내부로 들어가는 솟을삼문. ⓒ천지일보 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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