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영월 장릉(출처: 뉴시스)
영월 장릉(출처: 뉴시스)

장릉 조선 여류시인 옥봉의 여한

영월군의 대표적인 유적은 바로 비운의 왕인 단종(端宗, 1441~1457)이 묻힌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영월읍 영흥리 산133-1)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비운의 단종. 당시 영월에 있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시신을 몰래 수습,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는 알 수 없었다. 1541(중종 36)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선조 13)년 여러 석물을 세웠다. 1681(숙종 7)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숙종 24)년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가 있다. 충신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충의를 지킨 조선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조선 선조 때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峰)은 장릉을 지나면서 애절한 시를 짓는다.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실이 발각되면 참수를 면치 못하는 시기 가냘픈 여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그 용기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닷새간 길게 문 닫았다 사흘에 넘어서자

노릉의 구름 속에서 슬픈 노래도 끊어지네

첩의 몸도 또한 왕손의 딸이라서

이곳의 두견새 울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五日長關三日越 哀辭唱斷魯陵雲 妾身亦是王孫女 此地鵑聲不忍聞)

충북 괴산에서 삼척부사로 발령받은 부군을 따라 장릉을 지나면서 지은 시다. 옥봉은 중국 명나라에까지 문명이 알려진 여류시인이었다. 그녀의 시는 당대 사류들에게까지 맑고 씩씩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중국과 조선에서 펴낸 시선집에는 허난설헌의 시와 나란히 실려 있다.

그녀는 옥천(沃川) 군수를 지낸 전주 이씨 이봉(李逢)의 서녀(庶女)로 당대 촉망받던 조원(趙瑗)의 소실이 되었다. 어려서 부친에게 글과 시를 배웠으며 매우 영민하였다고 한다. 서녀의 신분이었기에 정식 중매를 넣을 수 없었으며 학식과 인품이 곧은 조원(趙瑗)의 소실(小室)로 들어가기를 자청하였다. 부친 이봉은 친히 조원을 찾아가 딸을 소실로 받아줄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조원의 장인인 판서 이준민(李俊民)을 찾아가 담판하고 비로소 받아들여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조원(趙瑗)의 첩이 된 옥봉은 이후 다른 소실들과 서신으로 시를 화답했으며 남편의 친구 윤국형(尹國馨)은 그녀의 시에 감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소동파의 시를 공부한 영향이다. 그녀는 하인의 억울한 사정을 돕다가 관청에 써준 시 한편이 문제가 됐다. 이로 인해 부군인 조원의 화를 사게 되어 결국 친정으로 내쳐지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란 중에 사망하였다. 일설에는 시고(詩稿)를 몸에 둘둘 묶고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 물에 빠져 죽어 시신이 해안에서 발견됐다는 야사도 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은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伯玉, 趙瑗의 字)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었다’고 평했다.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

정양산성 너머로 보이는 영월 동강
정양산성 너머로 보이는 영월 동강

에필로그

‘무릉도원’ 영월군은 역사와 문화, 관광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고장이다. 삼국시대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남은 속칭 왕검성인 ‘정양산성(正陽山城)’은 글자대로 제왕을 상징하며 고구려 내생(奈生)시기까지 올려 볼 수 있는 유적이다. 어라연, 내생, 정양은 모두 제왕과 관련된 지명이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낀 고준한 정양산 절벽 위에 축조한 것도 고구려 방식이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안에서 적색의 와편을 다수 찾았다. 붉은 기와는 고구려를 상징하고 있다. 학자들이 이 성에 산란한 적색기와를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곡성(曲城)과 치(雉) 등 고구려 요소가 많음이 확인된다. 중국, 북한, 한강, 임진강을 위시 경기도 양주, 오산, 평택에서 조사되는 고구려 유적과 비교 연구하여 판단해야 한다.

영월군은 정양산성을 대표적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과 공동으로 ‘영월정양산성의 보존 및 활용방안’ 학술심포지엄까지 열었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대 고구려 ‘내생’의 역사가 묻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양산성 서문
정양산성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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