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한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정조대왕태실비
정조대왕태실비

글마루 취재반 산성에 오르다

영월읍 정양리 산1-1. 진달래 향이 그윽한 4월초 글마루 취재반은 정양산에 구축된 산성을 올라갔다. 성을 답사하려면 영월화력 발전소 동남단에서 산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동강의 낭떠러지를 낀 등산로를 따라 절경을 보는 것도 운치가 있다. 그러나 등산로 경사가 높아 숨이 턱까지 찬다.

등산로 입구에서 만나는 것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태실(胎室)이다. 정조의 태를 봉안한 태실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본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했다고 한다. 태실은 현재 2기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받침돌 위에 둥근 몸돌을 올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얹었다. 다른 하나는 원통형 돌함(石函) 위에 반원형의 뚜껑돌을 얹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태실 양식이다.

성으로 오르는 길을 발굴 때문에 막아 취재반은 계족산 협곡 등산로를 택했다. 이 길이 본래 산성으로 오르는 길보다 두 배나 험하고 길다. 결국 취재반은 2시간여 시간을 소비해 장엄한 정양산성의 곡루(曲樓) 성벽을 만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와 닿는다. 거대한 석성의 웅자가 땀으로 범벅이 된 취재반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멋지고 잘 남은 성벽이 있을까.

취재반은 성안으로 들어와 다시 남동향하여 내려갔다. 남한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더 할 수 없는 장관이다. 성의 기저부분은 석재를 장방형으로 잘 다듬어 비스듬히 올려 쌓은 모습이다. 그리고 빈 공간은 작은 돌들을 파쇄하여 넣었다. 삼국시대 석축산성의 전형적인 축성 방법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중국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환도성(丸都城)의 외면과 닮아있다. 일부 구간은 보은 삼년산성이나 온달성의 축조방식과 같으나 일부 구간은 고구려 냄새가 강하게 엿보인다. 방형의 돌을 힘들게 잘 다듬어 들여쌓기로 쌓은 것이다.

성안에서는 유독 신라 와편이 많이 눈에 뜬다. 신라에서 대대적인 보축을 하며 중요한 관방으로 삼았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곳저곳에서 산견되는 적색의 와편은 이 성의 본래 주인이 고구려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선조문(線條紋) 승석문(繩蓆文) 와편은 고구려인의 손길이 닿은 듯하다.

취재반은 성안에서 작은 납석제 연화문 조각을 수습했다. 천각(淺刻)으로 된 이 유물은 1개의 연판(蓮瓣)과 간판(間瓣)이 남아있는데 불상의 연화대좌 편이 아니었을까. 연판은 이중선으로 싸고 연판 안에는 다시 작은 연꽃을 장식했다. 충주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동삼존불(국보 제134호, 리움박물관 소장)의 연화대좌를 닮아있다.

정양산성에서 찾은 납석제 연화문 조각
정양산성에서 찾은 납석제 연화문 조각

정양산성의 축조 시기와 형태

이 성에 대한 축조시기를 놓고 학계는 양분된 시각을 보여 왔다. 전 단국대 박물관장 고(故) 정영호 박사는 ‘왕검’이라는 명칭과 성의 축조방식을 고려하여 축조시기를 고구려시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전 충북대 차용걸 교수는 성의 축성기법으로 보아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비견될 정도로 기초보강축조부가 신라 축성기법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차용걸 교수는 삼년산성이나 고모산성을 비롯하여 신라의 석축 성곽, 특히 산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평면이 반원형인 곡성에서 (장)방형 내지 제형의 평면을 이루는 치성으로의 변화가 온달산성과 정양산성 내성에서 나타나고, 이들에서도 계속 현문이 주류를 차지하는 특징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강원고고문화연구원의 보고서(2017)>에서도 1~3차 발굴조사를 종합하여 신라성으로 의견을 집약하고 있다. ‘문헌기록이 풍부한 정양산성은 발굴조사로 확인된 유구의 성격이나 특징 출토된 기와·토기류 등으로 볼 때 7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까지 운영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성의 기저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번 보축한 흔적을 보인다. 사용한 돌들도 모양이 각기 다르다. 고구려 축성에서 보이는 장방형의 벽돌같이 잘 다듬은 돌들이 많이 보이고 삼년산성이나 온달성에서 나타나는 장방형의 돌들이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축성석재는 벽돌처럼 다듬는 것이 특색이다. 중국 지안(集安)의 환도산성(丸都山城), 오녀산성인 홀승골성(紇升骨城), 국내성(國內城), 평양성(平壤城), 백암성(白巖城)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신라는 장방형의 다듬은 석재를 사용했는데 일부는 판상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들이 많다.

정양산성에서 고구려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부분은 외면을 정연하게 들여쌓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방식은 포천 반월성, 양주 대모성, 충주장미산성, 오산 독산성 등 유적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필자는 정양산성이 5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처음 축성하고 그 다음 6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점령된 후 그 석재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보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이 성은 내외성을 갖춘 구조다. 내성을 석축하고 외성은 판축형태를 보여 준다. 어느 것이 더 시대를 올려 볼 수 있을까. 내성 안에서는 삼국시대 와편과 토기편들이 다수 보이지만 외성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와편 토기편이 산견된다.

그리고 고구려 성의 특징 가운데 중요한 것은 바로 험준한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축성했다는 점이다. 고구려 성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중국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 남동쪽에 있는 백암성(白巖城)이다. 기록에서도 험준한 곳을 선택하여 축성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 권199에 ‘인산임수사면절험(因山臨水四面絶險)’, <삼국사기> 21 고구려 보장왕 3년조에 ‘성사면현절 유서면가상(城四面懸絶 惟西面可上)’라고 나오는 것이다. 즉 ‘물에 임한 절벽에 쌓았으며 성 사면이 높은 절벽이다. 오직 서쪽에서만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정양산성도 이처럼 험준한 남한강 절벽을 이용하여 쌓았다. 강을 지나면서 이 성을 점령하기란 불가능하다. 고구려는 이 남한강을 통하여 죽령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제어하려 했을 것이다. 신라가 정복한 후에는 동강이나 평창강을 통하여 남하하는 고구려 군을 이 성에서 막으려 했을 것으로 상정된다.

또 주목되는 것은 성벽과 문터, 곡성(曲城)과 치성(雉城)이다. 정양산성에서는 내외성에서 대규모 치 2개소와 작은 치성이 여러곳 확인된다. 그 형태는 백암산성과 비슷하며 고구려 유적인 경기도 안성 무한산성(無限山城. 글마루 2020. 4월호)의 경우와도 닮아있다.

오녀산성
오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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