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여주 파사성
여주 파사성

파사성의 주인공들은 누구였나

‘파사성’이란 무슨 뜻인가. 원래 ‘파(婆)’는 ‘할미 파’자이며 ‘사(娑)’는 ‘춤출 사’자로 나온다. 대모성 혹은 할미성과 같은 뜻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성의 설화는 신라 5대 임금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과 연관시킨다. 과연 2세기경 신라가 여주까지 진출, 이름을 붙인 것일까.

우선 파사왕과의 연관되는지 알아보자. 신라와 백제는 개국 초기부터 분쟁이 있어 왔다. 지금의 충북 보은 지역인 와산성에서의 잇단 충돌이었다. 백제 다루왕은 36(63)년 직접 낭자곡성(충주)을 순시하며 이 일대를 개척한다. 다루왕의 행차는 백제 국경을 한강 상류인 조령(소백산)까지 획정하겠다는 과시였다. 다루왕은 이때 신라왕에게 만날 것을 요청하지만 신라는 응하지 않았다.

백제는 신라가 강성해지자 기루왕 29(10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했다. 그리고 167년에는 신라군이 한수가까이 진격했음을 알려주는 기사가 있다. 즉 백제가 국경지역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자 신라 아달라왕이 직접 정병 8000명을 이끌고 한수(漢水)에 이르자 약탈한 백성을 돌려보냈다. 한수는 한강 본류인 ‘서울’인가 아니면 안성인 ‘한천(漢川)’인가. 이 시기 과연 여주 파사산성이 신라에 의해 축조된 것일까. 당시 파사왕은 초기 신라국가 기반을 다진 임금이었다. 우선 파사왕이 누구인지 알아본다.

신라의 제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재위 24~57)의 둘째 아들이다. <삼국유사>의 왕력(王曆) 편에는 파사이사금의 어머니가 유리이사금의 왕비인 사요갈문왕(辭要葛文王)의 딸 김씨(金氏)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의 왕비에 대해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딸,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 박씨(朴氏) 등으로 전하고 있다. 따라서 파사이사금의 생모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파사이사금이 유리이사금의 동생인 나로(柰老)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인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金氏)이며, 신라의 제6대 왕인 지마이사금(祗摩尼師今, 재위 112~134) 등의 자식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왕비가 사초부인(史肖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두산 백과사전 참조).

파사왕은 국방에 주력 여러 성들을 축조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파사이사금 8년조에 보면 가소(加召), 마두(馬頭) 두 성을 쌓았다고 돼 있다. 이 시기 파사왕의 축성에 즈음한 영(令)이 기록된다.

“짐이 부덕함으로써 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서(西)로 백제와 이웃하고 남(南)으로 가야와 접근하였는데 덕으로 무마하지 못하고 위엄으로 두렵게도 못하니 마땅히 성루를 튼튼히 하여서 적의 침략에 대비 토록하라. 이달에 가소. 마두의 두성을 축조하였다(朕 以不德有此國家 西鄰百濟 南接伽耶 德不能 綏 威不足畏 宜缮葺城壘 以待 侵軼 是月 築 加召 馬頭 二城).”

그리고 23년에는 음집벌국(音汁伐國, 경상북도 안강)과 실직국(悉直國, 삼척), 압독국(押督國, 경산시 압량) 두 나라 왕도 항복하고 나라를 바치기도 했다. 또 동왕 29년에는 군사를 일으켜 비지국(比只國, 경주 부근), 다벌국(多伐國, 대구 부근). 초팔국(草八國, 합천?)을 쳐서 합병시켰다.

파사왕의 정벌은 경주 주변의 진한 소국에 국한되었다. 왕이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하여 여강까지 진격하여 파사산에 축성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일시 군사들을 데리고 지나칠 수는 있지만 이곳을 개척·진주하여 경영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왜 파사성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신라성 이름에 무게를 두는 학자들은 성벽의 축성방식과 성돌의 치석방법 등으로 미루어 6세기 중엽 이후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신라에 의해 초축되었으므로 이 같은 상상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신라가 고구려를 퇴출시킨 후 수축을 하면서 전설적인 ‘파사’의 명칭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주 파사성에서 바라본 여주시 전경
여주 파사성에서 바라본 여주시 전경

발굴조사 기록 빠진 고구려 관계

파사성은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모두 6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성벽 및 성 내부시설 등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이 파악되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가장 중요한 고구려 유적, 유물 등에 관해 언급이 없다. 보고서에 나온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파사성의 성벽은 내·외협축으로 축성되었는데, 초축 성벽과 수축 성벽으로 구분된다. 초축 성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ㄱ’자형과 단면 삼각형의 기단보축 등 2가지 방법의 기단 보축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보축방법의 차이는 수축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축성벽은 축조법이 약간씩 달라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성벽의 최고 높이는 약 6.5m이고, 상단 폭은 3.2~7.2m이며, 하부 폭은 10m 내외이다.

성내 시설물은 문지 2개소, 포루 3개소, 우물지와 수구지 그리고 곡성지 각 1개소, 추정 건물지 8개소 정도이다. 이 중에서 동문지와 포루 2개소, 곡성지 그리고 몇 개의 건물지가 성벽과 함께 발굴되었다. 동문지는 성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의 하나로 방형의 옹성(甕城)이 구비된 개방형 문지인데, 기단부에 2회 이상의 수축 흔적이 있다. 포루는 기존에 치(雉)로 알려진 구조물로서 남벽과 북벽에서 조사되었다.

파사성 내부에서는 동벽과 서벽 주변의 건물지가 조사되어 주거지 2기, 구들 23기, 건물지 4기, 저장공 1기 및 축대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장방형주거지와 백제시대 주거지가 1기씩인데 백제시대 주거지는 한강이 조망되는 구릉의 암반을 파고 수혈식으로 만들어졌다. 구들은 총 23기가 확인되었는데 방형 혹은 세장방형으로 괴임돌 위에 장방형의 면석을 구들장으로 사용한 구조이다. 건물지는 4기 중에서 2기가 2칸 규모의 소형이고, 1기는 15×5m의 크기이며 또 다른 1기는 규모가 확인되지 않았다(경기 문화재 연구원 자료 참고).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옹성(甕城)의 유구이다. 옹성은 중요한 성문 밖이나 안쪽을 둘러막은 시설물로서 적이 직접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삼국시대에 시설된 유구는 고구려 산성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런 형식은 고구려산성 등에서만 나타난다. 옹성의 다른 한 형식은 성벽이 성문부근에 이르러 성안으로 네모나게 오므라들면서 옹성을 이루게 한 것이다. 이런 형식의 옹성으로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남문의 옹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왜 고구려를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이미 오래전 남한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산성에 대한 인식이 없을 때 조사됐기 때문이다. 학계나 시 당국에서 파사성에 대한 재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고구려사나 유적을 조사한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여주 파사성을 처음 쌓은 세력인 백제 소축의 판축 현황
여주 파사성을 처음 쌓은 세력인 백제 소축의 판축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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