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근처에서 바라본 대모산성
근처에서 바라본 대모산성

할미성 대모산성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천 대모산성(大母山 城)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모산성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6백 7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在縣 東六里 石築 周 二千六百七十尺 內有 一井 今閉).’

이 정도의 크기라면 삼국시대 초기 일국의 읍성이나 왕성으로도 손색이 없다. 서울 풍납리 몽촌토성이나 파주, 연천, 안성 도기동 지역의 백제 초기 이중성과 견주어 크기도 비슷하다.

또 ‘한뫼성, 할뫼성, 할미성’이라고 불린다. 조선 지지자료에 ‘할미셩산’ ‘할미셩고’라는 지명이 나온다. 원래 큰 성을 의미하는 ‘한뫼성’으로 불렸다가 ‘할뫼성’을 거쳐 ‘할미성’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는 오래된 성이면 거의 할미성이란 명칭이 붙는다. 그러나 대모성이란 이름은 그리 많지 않다. 대모성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지니고 있는 성은 국내성 지안 왕도, 양구 대모산성, 진천 대모산성 등이다. 지안 국내성 유적에서는 10년 전에 ‘대모성길(大母城吉)’이라는 명문와당이 출토되어 한국에 전래됐으며 필자가 직접 조사하여 발표(천지일보, 2019. 10. 3)한 바 있다. 고구려 구토에서 찾아지는 규모가 큰 성들이 대모성으로 많이 불려진다.

대모성은 한마디로 ‘큰 성’을 지칭한 말이다. 또 왕성 혹은 치소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일 부 학자들이 진천 대모산성을 가리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모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하는 데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모산성은 나제 간의 치열한 전투를 감안할 때 오히려 청주 부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조사 보고서를 보면 이 성은 구릉지에 위치한 토축의 산성인데 <여지승람>의 기록과는 다르다. 삼국시대 초기의 형태인 판축(版築)으로 되어있으며, 성 기저 부분에 약간의 석재로 보축한 것이 조사되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성의 초축 연대는 더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

대모산성은 왕성이나 읍성처럼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실측치는 내성은 둘레가 827m이다. 서남으로 수구(水口)터가 있고, 문지는 이미 훼손되었다. 북쪽으로도 작은 문지가 있으며 성벽이 꺾이는 부분은 보다 높고 넓은 성벽으로 되어 있다.

외성은 내성의 동벽과 외성의 서벽이 벽체를 공유하며 둘레가 660m이다. 성안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와질토기를 비롯해 각종 토기편이 출토된다.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성벽은 구릉의 능선 정상부에서 외향의 사면을 이용하여 축조되고, 곡구에서는 내외협축(內外夾築)의 성벽을 만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성의 주변에는 초기철기시대인 마한시기의 고분군을 비롯해 신라 석실분도 조사되었다. 또 인근에 있는 석장리에서는 제철 유적이 찾아졌으며 산수리와 삼룡리에서는 백제토기 가마터 유적이 발견됐다. 학계는 백제의 중앙지역에 철과 토기를 공급하였던 중심지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진천군과 우석대학교 산학협력단은 대모산성의 관광자원화를 적극 모색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대모산성 재조명을 통한 문화관광 콘텐츠 개발’을 주제로 ‘생거진천 미래포럼’을 갖고 복원과 정비를 통해 미래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생거진천이라 보이는 진천 농다리 옆 인공폭포
생거진천이라 보이는 진천 농다리 옆 인공폭포

취재반 대모산성을 답사하다

글마루 취재반은 11월 초 대모산성을 답사했다. 취재반과 한국역사문화연구회원들로 구성 된 답사반은 이른 아침 서울을 출발하여 11시 쯤 현장에 도착했다. 고구려가 가야나 백제로 부터 빼앗아 경영했다면 이 성안에는 분명 붉은 기와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다.

토성의 입구부터 답사반은 고구려 유물이 혹 찾아질 것인가 하는 기대를 했다. 경작지 주 변을 와편이나 토기가 산란하지 않을까 천천히 걸었다. 이 정도의 큰 성이라면 많은 관청 과 민가가 자리 잡았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 조사 보고서>를 보면 이 성에서는 마한 계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넓은 성이지만 현재는 토기편을 수습하기가 녹록치 않다. 간혹 드러나는 마한 시대의 와질 토기가 눈에 띈다. 토성 능선으로 올랐다. 무너져 내려간 곳에서도 고대의 흔적이 찾아진다.

대모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대모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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