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사산성에서 바라본 위례산(위례성)
사산성에서 바라본 위례산(위례성)

발굴로 드러난 고구려 사산성의 제원

사산성은 근 30년 동안 수년을 거르지 않고 답사한 유적이다. 40년 전 필자는 당시 강릉대 이원근 교수(고대사, 지금은 작고, 서원학회 회장)와 함께 사산성과 위례성을 처음 답사했다. 조선 전기 세조 때 세웠다는 온조왕묘(溫祚王 廟) 유지를 찾기 위함도 있었다.

<여지승람> 사묘조에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는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온조왕묘 유적은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찬바람이 채 가시지 않은 3월초 사산성은 질척거렸고 산란한 유물들은 필자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안에서 수습된 토기 가운데는 무수한 마한시대 적색 조질 토기 편과 파수(把手, 쇠뿔 손잡이) 그리고 붉은 색의 기와들이었다. 이 유물들은 평소 사산성을 마한 수장국의 목지국으로 지목해온 필자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결과물이었다.

이날 답사에서 필자는 이 교수가 건강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직감했다. 평소 혈압과 당뇨로 고생해 온 이 교수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여러 날 잠을 설쳤던 것이다. 찬바람에 닿은 얼굴은 창백했고 경련이 일었다. 고도 579m가 넘는 위례성 등정은 더 어려웠다. 답사를 포기할 형편도 안 돼 강행했다.

이후 이 교수는 병원 입원 몇 년을 반신불수로 고생하다 운명하고 만다. 굳이 이 교수 얘기를 반추한 것은 그가 이 산성을 조사 연구하고 중부권 많은 고대 산성들을 찾은 제일의 공로자라는 점을 상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이 교수의 명복을 빈다.

사산성은 표고 176m인 성산의 주봉에 구축한 내외성을 갖춘 포곡식 산성이다. 약 750m 규모의 산정식산성이 있고, 이 산정식산성 동서 양단에서 북으로 연장해 북향하여 흐르고 있는 작은 계곡을 포용하여 축조한 길이 1030m의 외성으로 구성돼 있다. 1997년 8월 5일 대한민국의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 되었다.

중부지방 산성연구의 제1인자로 알려진 차용걸 교수(고대사, 전 충북대)가 낸 1994년 백제 문화연구개발연구원의 조사서에는 이 성에 대해 자세한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 중요한 부분을 발췌했다.

산정식산성(山頂式山城)의 성벽구조는 동벽과 북벽에서 확인되었는데, 동벽에서는 외측의 석축과 내측의 판축토루의 2가지 성벽이 나란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북벽에서는 석축의 성벽이 나타났다. 이 석축은 거의 수직으로 기단이 없이 쌓아 올린 것이다. 동벽 석축의 특징 은 생토면 위에 놓이는 기초석과 제2, 3단의 석축이 거의 직립하면서 수평적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측으로는 석재나 석재편으로 적심하였다.

외곽인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의 판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동문지의 북측으로, 이곳 에서는 성벽의 외면이 북측 옹성(擁城)으로 인하여 다른 부분에 비하여 훼손이 덜하였다. 이곳에서 파악된 특징은 ①판축의 외측면 하단에 석축기단석열을 두고 있으며, 이 석열은 단면이 계단식이다. ②판축의 외측면 하단의 석축기단석열은 주간(柱間)에서 사직선을 이룬다. ③판축의 외측면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주혈(柱穴)이 남아 있고, 주혈은 각재를 사용하되 수직으로 세웠다. ④판축의 외측면 하단 외측에는 원형의 주혈이 1개 혹은 2개씩 존재한다. ⑤판축의 외측면 기단석열 상단과 판축의 첫 번째 다짐 부분은 적갈색 점질토로 하고, 사질(砂質)의 석비레와 점질토(粘質土)가 교대로 판축된 것이라 하겠다.

남북의 옹성(擁城)은 18m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북측은 주초적심에서 6m, 남측은 8m나 떨어져 문 밖의 정부(庭部)는 거의 평탄한 평면을 구성하고, 바깥으로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이들 옹성은 체성이 만들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유구, 특히 기단부의 결구(結構)와 판축방법의 차이를 나타내는 주혈의 상이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산성 기저부 석렬과 판축 모양(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산성 기저부 석렬과 판축 모양(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고구려 흔적 치성

이 성에서는 고구려 강점 이후 보축한 형태를 보여주는 치성(雉城) 유구가 확인되고 있다. 차 교수는 치성은 판축의 단위 구간이 4.3m인 2칸의 판축으로 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판축의 기단은 선단부에서는 경사도가 심한 지면 때문에 견고한 계단식의 석축을 7~8단으로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기벽(基壁) 석축은 길이가 7.5m이고 너비가 1.2~1.6m로 쌓았다. 그 상면에 보다 안쪽으로 들여서 2단의 판축기단 석열을 놓았다. 그리하여 거의 수평을 이룬 판축기단 상면을 조성하고 있다고 했다.

발굴결과로 보이는 치성의 구축 현상은 완전 고구려식임을 알 수 있다. 즉 양구 비봉산, 포천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 등에서 찾아지는 양태인 것이다.

또 차 교수는 ‘판축은 원주(圓柱)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다른 체성과 달리 원주를 세웠고, 다시 외측으로 또 다른 주혈이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판축의 또 다른 형식으로서 기단보축에 의한 판축상면의 수평화가 확인되고 있으나, 판축기둥과 그 밖에 기둥을 세우는 방법에는 변화가 없고, 다만 각주가 원 주로 바뀌었을 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직산현 관아.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어 ‘호서계수아문’이라고 쓴 현액을 아문의 어칸에 달았다.
직산현 관아.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어 ‘호서계수아문’이라고 쓴 현액을 아문의 어칸에 달았다.

글마루 취재반 사산성에 오르다

사산성은 직산 구 관아에서 뒤로 오르는 것이 유리하다. 날아갈 듯한 2층 관아 누각이 취재반을 맞는다. ‘호서(충청도를 지칭) 경계의 첫 관문(湖西界首衙門)’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가을이 성큼 왔음을 알려주는 쪽빛 단풍색이 곱다. 취재반은 산성의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올랐다. 여기저기 뒹구는 토기 조각과 와편을 조사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고대의 편린들이 산란하다. 회색은 백제계이고 적색은 고구려계다. 고구려로부터 이 성을 뺏은 신라는 대 백제 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래서 신라계 와편과 토기가 가장 많다. 마한의 유물인 무문토기의 파편도 수습된다. 옛날에 수습했던 무문토기 계열의 파수는 혹시 없을까. 혹시 ‘목지(目支)’라고 쓴 기와편은 없을까. 만약 이런 유물이 찾아진다면 학계의 논쟁도 사라질 것이다. 산 정상에 오르니 위례산이 손에 닿을 듯하다. 안성 땅과 경계를 이룬 안성천, 멀리 안성시도 기동 유적도 보이는 듯하다. 고구려는 왕성인 이 성을 정복하고 도읍을 지칭하는 ‘사산성’으로 불렀다. 전 시대의 역사를 상고하면서 왕과 관련이 없었다면 이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산성에 진출한 고구려 세력은 인근의 진천을 공취하고 이어 남하하여 금강까지 세력을 확산한다. 진천의 고구려 지명은 만노군(萬弩郡)이며 청주를 낭비성(娘臂城) 혹은 비성(臂城)이라고 했다. 모두 한강 이북의 땅에 등장하는 고구려식 지명이다. 이곳에서도 이들은 적색기와와 이들 특유성 난공불락의 요새인 치성(雉城)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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