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령 기네스 도전을 앞둔 김엄곡(114) 할머니. 3~4년 전부터 노환으로 점차 기억이 어두워지면서 현재는 노인요양병원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사진은 기자가 할머니를 찾은 지난 3일, 평소 바닥 생활을 해오시던 터라 침대보다 병실 바닥이 편하다며 이불 위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를 촬영한 것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최고령’ 검증 논란··· 아들 “어머니 114세 확실합니다”

[천지일보=백하나 기자] “아이고,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악수를 건넨 김 할머니 둘째 아들 정모(73) 씨의 얼굴이 무척 수척했다. 어머니가 국내 최고령 기네스에 오른다는 기사가 뜬 이후 그는 본의 아니게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시끄러울 줄은 몰랐다고 전했다. 지난 3일 오후 1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처음으로 <천지일보>에 그간의 심경을 털어놨다.

- 어머니 김엄곡(114) 씨가 국내 최고령 할머니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됐다. 초반에는 다들 세계 최고령 할머니라고 해서 관심을 보였는데 요즘은 호적에 나이가 맞느냐, 안 맞느냐로 논란이 일고 있다.

“며칠 동안 방송이며 신문 등에 숱하게 연락이 왔다. 어제도 A신문 기자랑 오랫동안 전화 통화를 했는데 별말을 다 들었다. 개인적인 일이며 가족사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정신이 없다. 시청에서 전화를 알려준 모양인데···. 속도 모르고 남들은 어머니가 기네스북에 오르게 됐으니 밥을 사라고 난리다.”

정 씨는 이름과 얼굴 등이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승낙했다. 커피숍에 앉자마자 그는 담배부터 빼내 들고 기자와 마주했다.

-지난 2월 24일 자에 B신문은 김엄곡 할머니의 기록이 구리시에서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고 낸 것이라고 보도했는데 알고 있었나.

“모르고 있었다. 뭐라고 했나.”

기자는 해당 기사를 정 씨에게 읽어줬다. 기사에 따르면 114세로 기록 검증 중인 김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장수 노인이 더러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최고령자는 경남의 박모(1879년생, 132세) 할머니이며 지난 지방선거 때도 122, 115세 노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한 사실이 있다는 것. 하지만 시는 이 같은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기록검증을 신청했다고 B신문은 보도했다.

기사를 들은 정 씨는 “기네스에 오르는 것은 사실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검증은 시에서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고 외면했다.

경기도 구리시청이 이번 기네스 도전을 추진한 이유는 김 할머니를 포함해 도내 세계 최장·최고 기록을 가진 기네스 보유자를 모아 ‘멘토용 교재’를 제작한다는 방침에서다. 시는 주민에게 애향심을 심어 주고 경기도를 알린다는 계획이다.

논란에 대해 구리시청 관계자도 다소 억울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3일 시 관계자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기네스는 ‘신청주의’가 원칙이다. 최고령이라도 한국기록원에 신청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지난 1월 미국 텍사스의 115세 유니스샌본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김 할머니가 호적상 나이가 많아 시에서 신청을 넣은 것”이라며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헛다리를 짚었다는 식의 보도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해명했다.

시의 말대로라면 신청주의에 입각해 김 할머니가 기네스 신청자로서 자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기록원에서 사실관계를 규명할 테지만 현재 김 할머니가 114세라는 증거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다.

정 씨도 서류를 들어 “자신의 어머니는 114세가 맞다”고 못을 박았다.

“시로부터 8만 5000원가량 지급되는 정부보조금을 타기 위해 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검증을 요구했는데 전산상 기록이 100년 단위로 남아 어머니가 조회되지 않았다. 그런데 2~3년 전 정산이 제대로 되면서 어머니의 나이 등을 증명할 서류를 갖추게 됐다.”

김 할머니의 지인들도 그가 축복받은 건강 체질이란 점을 인정하며 114세 이상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정 씨는 전했다.

- 평소 어머니의 건강은 어떠셨나.
“무척 건강하신 분이다. 어머니가 마흔여섯에 첫째 형을 늦둥이로 낳으셨다. 어머니는 3남 1녀를 낳으셨는데, 늦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 마을에서 잔치를 해줬다는 말도 들었다. 큰 형이 뜻하지 않은 일로 29세에 죽은 이후 직접 어머니를 모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평생 감기약을 3~4번 정도 사 드린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건강하시다. 평소 약도 잘 안 드시던 터라 약발도 잘 받으시는 편이다. 지금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의사들도 어머니께 약을 져 드리면 약이 잘 듣는다고 한다.”

- 어머니가 건강하시니 자녀들도 다들 건강하실 것 같다. 본인 건강은 어떠한가. (정 씨는 70대 노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혈색이 좋고 건강해 보였다.)
“글쎄···. 특별히 아픈 곳은 없다. 담배를 피우는데 사실 어머니도 요양병원 들어가기 5년 전까지는 담배를 피우셨다.”

- 할머니가 담배를 피우셨다니 놀랍다. 하루에 얼마나 피셨나.
“하루에 몇 갑은 아니고, 한 갑을 3일 정도 나눠 피우셨다.”

- 어머니가 즐겨 드시던 음식이 있었나.
“돌나물을 그렇게 좋아하셨다. 시집오기 전에는 하루 세끼를 돌나물 반찬만 먹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게 건강의 비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어머니가 하얀 박하사탕을 좋아하셨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병원에 계신 어머니 생각이 났는지 입술을 옅게 떨었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강인한 분이다. 내가 9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농사를 지으시며 자식 넷을 여자 혼자 가르쳤다고 생각해보라. 어지간히 강한 사람 아니곤 힘든 일이다. 또 지기도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셨다. (침묵···.) 그리고 아마 아플 새가 없으셨을 거다. 어쩌면 어머니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 강인함을 택하신 건 아닌가 싶다.”

이 말을 할 때 정 씨 눈에선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일찍 남편을 잃은 미망인, 아버지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자식들이 듣지 않게 하려고 김 할머니는 엄한 가장의 몫을 긴 세월 동안 감당했으리라.

어머니가 몇 년 전부터 치매로 아들의 얼굴을 몰라보기 시작할 때서야 73세 아들은 미처 다하지 못한 효를 떠올렸다.

정 씨는 “그래도 목소리는 옛날처럼 카랑카랑하시다. 정 씨는 “가면 ‘누구냐’고 물어보시다 ‘아들’이라고 알려주면 ‘왜 이렇게 늙었냐’고 면박도 주시곤 한다”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들과 요양병원 간호사 등에 말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자식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고 한다. 한 예로 병원에서 간호사가 할머니에게 밥을 내 드리면 “우리 아들 돈 없다”며 만류하시다가 “밥은 병원에서 무료로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그제야 수저를 드신다는 것.

기억이 어두워져 가는 상황에서도 자식을 생각하는 것을 보면 한평생 자식을 위해 사셨다는 말이 맞는 듯 보였다.

▲ 김 할머니가 계시는 경기도 동두천 소재 노인요양전문병원. ⓒ천지일보(뉴스천지)

- 그런데도 어머니가 요양병원에 가 계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나.
“가족들이 모두 서울에 올라오기 전까지 40여 년 전만 해도 어머니 혼자 충북 제천에 계셨다. 신세 지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 큰 집을 혼자 관리하시니 정리도 잘 안되고, 수리비가 새로 사는 것보다 더 들어 서울로 모시고 왔다. 근데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심해지시더니 새벽 1~2시에 문을 열고 나가셔서 행방불명되길 수차례 겪었다. 고부간의 갈등도 심했다. 요양병원에 가신 것은 3년 전부터다.”

정 씨는 어머니 일로 이혼 직전까지 5번이나 갔다고 했다. 그는 “병원은 때맞춰 식사를 내주고 목욕도 시켜주고 어머니 몸 상태에 맞게 치료도 해주니 나랑 힘들게 있을 때보다 당신 편에선 더 편하게 지내시는 것 같다”고 했다.

경기도 동두천시로부터 버스를 타고 20여 분은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도립 노인전문병원. 버스에 몸을 싣고 찾아간 곳에서 소망병동에 지내고 계시는 김엄곡 할머니를 만나 봤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죽 한 그릇을 다 비우실 정도로 건강하세요. 100세가 넘으신 나이인데도 볼일을 혼자다 보시고요···.” 간호사의 안내로 만난 할머니는 병원 침대 밑에 임시로 깐 이불 위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평소 바닥 생활을 하시던 분이라 침대가 불편하다 하셔서 밑에 계세요.”

간호사가 자리를 뜨자 김 할머니는 기자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저녁은 먹었냐”고 마치 자녀를 어르듯 기자를 챙겼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정 씨를 만난 지 서너 시간이 흘러 시곗바늘이 오후 6시를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앉으라는 할머니의 이불 밑으로 뭉뚝한 게 밟혔다. 신발이었다.

같은 병실을 쓰는 한 할머니는 “자기 것에 대한 욕심이 강해서 이불 안에 신발을 숨겨둔다”고 했다. 주변 할머니들은 “오래 살면 상도 주느냐”며 김 할머니를 치켜세웠다.

다른 할머니는 “신기하게도 김 할머니 흰 머릿밑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다”며 “120세까지도 충분히 사실 것 같다”고 말하면서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 ⓒ천지일보(뉴스천지)
김엄곡 할머니 때문에 세상은 시끄러운 줄도 모르고, 김 할머니는 TV 속 세상을 무심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최고령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된 것을 아느냐”는 질문에도 역시나 같은 반응이었다.

김엄곡 할머니와 아들 정 씨에게 ‘기록’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듯 보였다.

그날 저녁 정 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 명절 이후 병원을 찾아가지 못한 터라 어머니가 잘 계신 지 묻는 전화였다.

앞서 정 씨는 어머니께 바라는 게 있느냐는 질문에 “조선시대 같으면 어머니를 돌보지 못한 못난 놈 취급 받을 텐데, 어머니를 잘 모셔 기네스 신청을 앞두고 있다는 식의 관심은 부담스럽다”며 “아직 어머니에게 너무나 부족한 아들일 뿐이다. 어머니에 대한 검증이 잘 이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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