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오산 독산성
오산 독산성

발굴로 드러난 독산성의 역사

독산성은 경기 오산시 지곶동에 소재한다. 이 성은 해발 208m의 비교적 높지 않은 산에 축조되어 있으며 항구지천을 북서쪽 해자(垓子)로 삼고 있다. 백제시기 유행했던 테메식이나 치소(治所)의 격식을 따르고 있다. 총 길이는 1.3㎞에 달한다. 평지와 연결된 청양 우산성이나 충주 대림산성, 청주 부모산성 등 백제 일련의 치소성들과 흡사하다. 백제가 마한을 아우르면서 치소이자 방어시설로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내에 있는 사찰 세마세의 사적기에는 4세기 말 아신왕(阿莘王)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장수왕 시기 한성을 함락한 고구려군은 남하하여 백제 직산 사산성, 진천 만노성과 대모산성, 청주 비성(臂城)을 장악하면서 이 성도 고구려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로부터 독산성을 빼앗은 고구려는 이 성도 고구려식으로 보축했다. 독산성에 남아있는 모두 7개의 치성(雉城)의 유구는 고구려인들이 이 성을 구축했음을 알려준다. 이 치성이 훗날 임진전쟁 당시 왜군이 공격했을 당시 성을 수호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백제는 군사들을 일으켜 한강 이남의 많은 실지를 회복하였으며 독산성도 회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양원왕은 남방 공략의 교두보인 독산성을 탈환할 의도로 예(濊. 강원도 지역)를 앞세워 공격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나제동맹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후 독산성은 자연스럽게 신라의 영유로 넘어가게 되었으며 고구려 세력이 남아있던 천안시 직산 사산성도 신라영유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 4일 독산성 발굴 학술발표회가 현장에서 있었다. (재)중부고고학연구소와 한신대학교박물관이 조사 중인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이하 독산성) 학술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성곽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날 학술조사단이 밝힌 발굴 결과 요지는 다음과 같다.

독산성 북동 치 및 북문지 주변 성곽 일부에서 배부름 및 이탈 현상 등이 확인되어 성곽 보수·정비에 앞서 복원성벽 아래 숨겨진 원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확인해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실시한 것이다.

조사 결과 복원성벽 아래에 묻혀있던 삼국~조선시대 성벽을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삼국시대 성벽은 조선시대 성벽 아래에서 확인되었고, 내벽과 외벽을 함께 쌓는 협축(夾築)방식과 외벽만 쌓는 편축(片築)방식을 모두 이용해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을 달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의 바깥쪽으로는 체성벽 하단부를 보강하기 위한 기단보축을 조성하고 이에 덧대어 점토를 다시 보강하기도 했다. 내벽은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되었고 높이는 약 4m이다. 내벽은 외벽과 달리 가공하지 않은 할석을 이용해 층을 맞추어 쌓아올렸다. 조선시대 성벽은 삼국~통일신라시대 성벽의 적심부 상면에 쌓아올렸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문 아래층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문지와 적대 등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오산 독산성 세마대
오산 독산성 세마대

유물은 삼국~통일신라시대 토·도기편(타날문토기편, 단각고배편 등), 연화문 와당, 승문, 선문 및 격자문계 기와편, 고려시대 청자편·반구병, 조선시대 도기편·백자편·다양한 문양의 기와편·전돌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성벽 축조기법과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6~7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된 후 조선시대(15~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글마루 취재반은 1월 초순 독산성을 답사했다. 혹한의 겨울이지만 이날만큼은 햇살이 따뜻했다. 성안 곳곳 양지바른 곳에는 새싹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장수왕이 한강을 지배한 시기부터 양원왕대까지는 약 70년이 된다. 이 기간 동안 독산성은 고구려 군사들이 진주, 성을 관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와편이 나와야 한다. 포천 반월성 마홀(馬忽)이나 단양 적성산성, 대강면 용부원리 보국사지. 괴산 청천면 도원리 사지등 유적에서 많이 수습되는 적색의 와편을 말한다.

이 성은 북쪽으로는 성매(省買)인 수원, 남쪽으로는 사산성(蛇山城)인 직산과 교통로로 연계된다. 그러나 주위에 유사시 성민을 피신시킬 험준한 산이나 성이 없는 외로운 성이다. 고구려가 쉽게 빼앗긴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글마루 조사반은 성안에 흩어져 있는 적색의 고구려 시기 와편을 찾을 수 있었다. 이 기와들은 연천 당포성, 호로고루 성에서 찾아진 와편들과 같았다. 방격자문, 사격자문, 승석문들이다. 백제 신라 와편보다 성안 어디든지 산란하고 있다.

그리고 백제·신라·고려·조선시대의 와편이 산란함을 확인했다. 1000여 년 민족의 관방으로 역할을 한 셈이다. 혹 ‘獨山’ 혹은 ‘禿山’이라고 쓰여진 와편은 없을까. 명문기와를 수습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취재반은 와편이 산란한 곳에서 적색 고구려 평기와 파편 몇 점을 조사했다.

오산 독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오산 독산성에서 찾아진 와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