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백제 초축, 삼국 쟁패의 역사 타임캡슐

오산 독산성 암문
오산 독산성 암문

삼국의 운명을 가른 독산성 전투

독산성(獨山城)은 6세기 중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엉켜 싸운 격전의 현장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된다.

고구려 본기 양원왕 4(548)년조에는 ‘봄 정월에 예(濊)의 군사 6000명을 동원하여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의 장군 주령(朱玲, 또는 朱珍)이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패하여 물러갔다(陽原王 四年 春正月以濊兵 六千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 朱珍來援 故不克而退云云)’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속국인 예(濊)를 동원하여 독산성을 공격한 양원왕(陽原王). 당시 고구려 상황은 어땠을까. 이 시기 고구려는 북방민족의 침공과 간섭으로 나라가 위태로웠다. 중국 북사(北史)기록에는 양원왕이 북제 사신으로부터 매까지 맞는 사건이 벌어진다.

“천보 3(552)년 문선제가 보릉 최유를 보내 북위(北魏)말기에 고구려로 흘러 들어간 백성들의 송환을 요구하도록 하였는데 고구려에서 이에 응하지 않자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양원왕을 주먹으로 쳐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고구려 신하들은 겁을 먹고 감히 나서지 못했으며 5000호의 유민을 돌려보내주었다(天保三年、文宣至營州、使博陵崔柳使于高麗、求魏末流人。敕柳曰 ‘若不從者、以便宜從事’ 及至、不見許。柳張目叱之、拳撃成墜於床下、成左右雀息不敢動、乃謝服、柳以 五千戸反命).”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여러 나라에 많은 조공을 바친다.

“양원왕 4(548)년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550년 여름 6월에는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二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六年 夏 六月 遣使入北齊朝貢云云).”

이 기록을 보면 매년 고구려가 동위, 북제에도 꾸준히 조공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북으로는 이런 위기에 대응하는 상황 아래서 신흥 신라의 부상은 또 하나의 골치였다. 그러나 한강 이남의 고구려 관할에 주력할 여유가 없었다.

양원왕은 이런 복잡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독산성을 공격할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제 연합의 저항으로 패전하고 만다. 이 전쟁 이후 삼국관계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독산성에서 고구려군을 퇴각시킨 신라는 마음이 달라졌다. 신라는 한강유역과 경기평야를 보고 욕심이 생긴 것이다. 진흥왕 11년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상대의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자 신라는 두 나라 군대가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케 해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 지역은 지금의 충북 증평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진흥왕 12년에는 거칠부(居柒夫) 등으로 하여금 한강 주변 고구려를 공격하게 해서 10개의 군(郡)을 빼앗았다. 이런 일련의 전쟁들은 바로 독산성 전투 이후 2~3년간의 일이었다.

독산성 전투는 신라가 중부지역에서 고구려 세력을 차단하고 이 지역 진출을 확고하게 한 계기가 된다.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 일대의 실지회복이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으며 신라와의 50여 년 혼인동맹도 무너지는 결과가 되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에 치를 떨었으며 양국은 줄곧 한강과 금강 주변에서 살벌하게 대립했다. 독산성 전투 이후 6년 후인 554년에 백제 성왕은 고리산(古利山, 현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에 생포되어 참수되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오산 독산성
오산 독산성

독산성은 어디인가

이러한 독산성의 위치를 두고도 이견이 많다. 한강 이북설, 충남 예산설, 경기 양주설, 포천설 그리고 오산설 등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김취려전(金就礪傳)>에 나오는 경기도 양주의 독산(獨山)이 지목되기도 한다.

한강 이북설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나오는 ‘한북(漢北)’이라는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권제 26 성왕 26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정월에 고구려왕 평성이 예와 더불어 공모하고 한북의 독산성을 침공하므로 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청하니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에게 명하여 군사 3000명을 내 주었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싸워 이를 대파하였다(二十六年 春 正月高句麗 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求於新羅 羅王命將軍 朱珍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예산설은 일본서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즉 독산(獨山)을 고산(孤山)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9(548)년 4월조에 고구려가 침입한 것으로 나오는 마진성(馬津城)을 백제가 멸망한 후 당이 설치한 현에 ‘마진현은 본래 고산이다(馬津縣本孤山)’라고 한 것을 인용, 독산성으로 비정한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웅주(熊州) 고산현(孤山縣)은 지금의 충남 예산군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漢北’이라는 대목이다. 예산 독산성은 한북(漢北) 즉 한수(漢水) 이북과는 거리가 멀다.

한(漢)은 ‘크다’라는 뜻이다. ‘아(阿)’ ‘웅(熊)’과도 비슷하게 쓰여졌다. 고대에는 한강을 지칭하여 ‘한수’ 혹은 ‘아리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굳이 한(漢)자를 붙인 것이 한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국 각지에는 강이나 내(川)에 ‘漢’자를 붙여 쓴 예가 많다. 바로 평택 안성천의 상류를 ‘한천(漢川)’이라고 했다. 충북 제천시 남한강 변이 있는 한수(寒水)도 한수(漢水)의 다른 표기이다. 경기도 포천천의 옛 이름도 한천(漢川)이다. 서울 한강변 중랑천도 예전에는 한천(漢川)이라고 불렸다.

평택 한천은 예전에 지금보다 수량이 많았을 것이며 오산 평택을 지나 안성천과 합류 서해로 흐른다. 이곳을 옛날에는 한수(漢水)로도 부른 것은 아닌가.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안성천을 설명하고 있다.

“안성천은 길이 76㎞, 유역면적 1,722㎢. 옛날에는 안성남천(安城南川)이라고 했다. 하구 근처는 우리나라에서 조차가 가장 큰 곳 중의 하나로 대조시 평균조차 8.5m에 달한다. 중요한 지류는 진위천(振威川)·입장천(笠場川)·한천(漢川)·청룡천(靑龍川)·오산천(烏山川)·도대천(道垈川)·황구지천(黃口只川) 등이다. 안성천의 본류와 지류가 합류하는 곳 근처에는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바로 ‘漢川’을 북쪽에 있는 오산 독산성으로 주목해 왔다. 독산성의 한문 표기는 독산성(禿山城)이다. 독(禿)이란 뜻은 사전을 찾아보면 대머리 혹은 민둥민둥하다는 뜻이다.

삼국의 대립된 상황을 미루어 생각한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독산성의 위치는 오산에 있는 독산성이 가장 유력하다. 이 성은 외딴 성처럼 주변에 큰 산과 연계되어 있지 않아 흡사 고립된 산처럼 모인다. ‘獨山’과 ‘禿山’이 같이 쓰여진 것이 아닐까.

안성 한천
안성 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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